이방인들 앞에 인격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본문: 마가복음13:28-37
제목: 이방인들 앞에 인격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 인격적으로 오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주시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짜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있었는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나님 이름을 부르기는 쉬어도 그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었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보낸 아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 이름은 하나님의 표호일 뿐 진짜 하나님 이름이 아니다.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5)” 하나님을 온전히 대변하실 분을 오직 하나님 품속에서 나오신 아들 한분뿐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대리한 천사들의 활동이 많았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나타났던 여호와 하나님도 모두 천사들이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창18:1)” 만약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진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로 죄 사함을 받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데 구약에 등장하는 여호와 이름은 하나님을 대리한 천사들임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그토록 많이 등장하던 여호와 이름도 예수가 오시고 난 뒤에는 단 한마디 언급도 없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대리한 진짜 아들이 오셨으므로, 더 이상 여호와 이름으로 활동하던 천사들이 필요 없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여호와 이름은 하나님을 대리한 모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세가 그토록 큰일을 했지만, 그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지는 못했다. 따라서 율법과 모형 아래서의 신앙생활로는 인간들에게 어떠한 안식도 주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내고도,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입으로만 여호와를 믿었지 마음으로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입으로 믿는 것은 쉬어도, 인격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면 인격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이방인들에게 주신 예수 이름도 정확히 표현하면 모형에 불과하다. 불신자로 살던 자가 예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의 효력으로 인해서 원죄(아담이 지은 죄)를 사함 받았다는 증거로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나 값없이 성령을 보내주신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주신 성령은, 하나님의 법도 모르고 살던 이방 기독교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실 목적으로 주신 영적인 율법이다.
그런데 이방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예수를 믿고 성령만 받으면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입으로 믿는 것은 쉬워도, 인격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는 누구나 쉽게 믿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인격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은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면 절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쉬웠으나, 정작 하나님께서 보낸 아들을 믿는 것은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기 전에 반드시 율법을 먼저 주신다. 그것은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10:1)”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기 전에 율법과 모형을 먼저 주신 이유는, 인간이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겸손해지라는 것이다. 그래야 마지막에 보내는 아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방인들에게 주신 예수 이름도 모형인 것이다. 율법(모형)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수 이름이 모형이 아니고 실체이나, 아무런 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에게 주신 예수 이름은 실체가 아니고 모형에 불과하다. 이방인들에게 주신 예수 이름이 실체가 아니고 모형이라는 증거는,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약2천년 동안 예배당에서 날마다 예수 이름으로 열심히 예배를 드렸지만, 지금까지 그 예배를 통해서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마음속이 온전케 된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2천년 동안 소와 양을 잡아 죽도록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지만, 그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 어느 누구하나 온전케 된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율법 아래서는 결코 인간이 온전케 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온전케 하실 분으로 아들이 오셔야 했듯이, 오늘날에도 예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로는 결단코 인간이 온전케 될 수 없기에, 기독교인들 앞에도 인격적인 하나님 아들이 오셔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거역하게 되면 육체에 병이 들지만,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법을 거역하게 되면 마음속에 병이 들게 된다. 마음속이 병들게 되면 죄가 죄로 인식되지 않고 회개도 잘되지 않는다. 율법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병(죄악)을 치료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야 했듯이, 성령의 법을 거역하여 마음이 병(죄악)들어 있는 기독교인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 앞에도 인격적인 아들이 오셔야 한다. 예수 이름으로 날마다 드리는 예배로는 결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질병(죄악)을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말씀이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이런 말씀은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도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약2천 동안 조상대대로 믿어오던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정말 별 볼일 없는 나사렛 촌놈을 믿어야 구원이라니, 당시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그 말을 곧이듣겠는가?
마찬가지로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한 기독교 역사 또한 약2천년이 흘렀다. 지금까지 조상대대로 예수만 믿으면 구원이라고 믿고 살아온 기독교인들로서는, 인격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어야 온전한 구원에 들어간다고 하는 말에 심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8:7)”는 말씀처럼, 만약 첫 번째 주신 예수 이름으로 기독교인들의 모든 죄악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으면 또 다시 아들이 오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서 이를 분명히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고전12장이 성령의 법아래서 기독교인들이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로 부분적인 신앙생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고전13장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이 온전케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믿는 백성에게 율법을 먼저 주시고, 복음(아들)이 나중에 오는 이유가 비로 이런 관계 때문이다.
법아래 사는 자가 예수를 마음으로 믿었다면 그는 자신이 성령의 법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되었을 것이므로, 그는 장차 오실 아들도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냥 입으로만 예수를 믿은 자라면 그는 성령 받은 것을 가지고 구원 받았다고 잘못 알고 있을 것이므로, 그는 자신의 죄 또한 깨닫지 못하여 결국 아들도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 속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는 하나님 아들의 마지막 작업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