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헛되이 받지 말라!

거친반석 2014. 1. 5. 13:53

본문: 이사야55:6-13

제목: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헛되이 받지 말라!

 

성인들의 말을 우리가 귀담아 듣는 것은, 그들이 겪으며 살아온 세월들이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속담에 ‘어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연륜이 쌓인 사람의 말을 들으면 나쁠 것이 없다는 말이다. 하물며 보잘 것 없는 인생도 이럴 진데,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야 그 깊이가 얼마나 더하겠는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오늘날은 예배당에서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로는 인간이 온전케 될 수 없다. 그것은 법에 따라 하나의 의식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지, 그런 행위로 인간이 온전케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행위로 인간이 온전케 될 것 같았으면 그리스도께서 굳이 이 땅에 다시 오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들 앞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는 것은,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하나님 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첫째는,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 못 박아 피 흘려주셨고 두 번째는, 자신의 육체를 채찍에 맞아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율법을 담당해 주셨다.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범죄(율법을 거역한 죄)를 담당해 주러 오신 분이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육체를 입고오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것은,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원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다. 이때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피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예수 이름만 부르면 하나님께서 모두 원죄를 해결 받았다는 증표로 성령을 보내주신다.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의 댓가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다 해도,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과 법도 없이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인들의 삶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이 원죄를 해결 받았다는 증거로 성령을 받은 것 까지는 참으로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원죄 하나만 해결 받아서는 구원에 들어갈 수가 없다.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려면 자범죄까지 해결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먼저 율법을 거역한 자범죄를 사함 받게 되고, 그 다음으로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의 효력 때문에 성령을 받게 되어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아무리 오랫동안 성전에서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온갖 규례를 따라 살았다 하더라도,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율법을 거역한 자범죄를 해결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성령도 받지 못하여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율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은 예수를 믿게 되면 먼저 성령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 백성으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된다. 이는 바로 이방인들도 영적인 하나님 백성으로서 첫 걸음마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듯이, 이방인들 또한 어느 누구도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자는 없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인들 또한 모두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 되고 만다. 이를 두고 스스로 지은 자범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예수 믿고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 된 것이 아니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은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를 믿어야 죄 문제를 모두 해결 받을 수 있고, 오늘날 성령의 법(율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도말되지 않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 나가서 예수 이름으로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결코 그런 예배행위로는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가 도말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10:1)” 이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지고 있다.

 

하나님의 생각은 너무도 깊고 높아서 감히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리 인간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원대하셔서 인간으로서는 그 깊이를 가히 짐작할 수조차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조금이라도 알려면 하나님 품속에서 나오신 그리스도 영을 우리 마음속에 모셔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미 2천 년 전에 이삭이라는 예표를 주셨다. 그리고 정확히 2천년 후에 당신의 아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보내주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약4천년 후에 일어날 일까지도 이미 계획하고 계셨다. 리브가의 뱃속에서 쌍둥이가 잉태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큰 자를 버리고 작은 자를 선택하신 것은,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하나님 아들로 큰 자(에서 같은 자)를 버리고 작은 자(야곱 같은 자)를 선택하여 이방인의 구세주로 삼으실 것을 미리 예표하고 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자리를 빼앗는 사기꾼 같은 야곱을 버리고, 사내답고 씩씩한 에서를 선택함이 백번 옳은 일로 보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빗나가게 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9)” 인간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나 하나님께서는 인간 마음을 보고 판단하신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하나님 아들 역시 야곱처럼 사기꾼 같은 기질이 있는 자가 아들로 선택 받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곧 이방인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기도 한다. 이로서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하나님 아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특성을 지니게 됨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반드시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0)”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인간이 사용했을 때, 그 말씀이 본인에게 사실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이 된다. 하물며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그냥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을 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들었다면 당연히 죽은 내 영혼이 살아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한강물 퍼다 쓰듯 가져다 사용하지만,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의 영혼이 살아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그들 마음속에 죽은 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아직도 기독교인들이 모두 죄 아래 살고 있다는 증거다. 기독교인들은 누가 뭐라 해도 모두 성령을 거역한 죄인들이다. 죄인들이 아무리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을 전해도 죽은 영혼은 살아나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꾸만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자신의 마음속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믿고 있는데, 현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 만약 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셨더라면 그들은 벌써 예배드리는 행위를 그쳤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시게 되면 자기 안에 거룩한 성전에 건축되어지게 되므로 더 이상 사람 손으로 지은 예배당에 나가 예배드릴 필요가 없다.

 

예배란 바로 죄 아래 살고 있는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기 위해서 드리는 하나의 의식행위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계시다다면서 계속에서 예배당을 찾는 것은 아직도 그들 마음속에 예수가 계시지 않다는 말이다. 예수가 자신의 마음속에 계시다면 한낮 인간에 불과한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또 다시 예배당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아들이 우리 마음속에 오시기 전까지는 예배당이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주인이 오셨으므로 더 이상 지난 과거에 붙들려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다시 한번 곰곰이 되새겨 보기 바란다.

 

신약(예수)시대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구약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가 그리스도 앞으로 안내하는 몽학 선생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다 때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새로운 성전으로 예수가 오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새로 오신 성전(예수)을 믿지 않고 자꾸만 낡은 건물(성전)속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면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물론 새로운 성전이 오시기 전까지 손으로 지은 건물이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성전이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지어진 것이므로 더 이상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영적인 백성들 입장에서 볼 때, 신약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가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다 이제 때가 되어 이방인들 앞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적인 아들을 보내 주셨다. 그런데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영적인 아들을 믿으려하지 않고, 자꾸만 사람 손으로 지은 건물(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드리기를 좋아한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지금까지는 예배당이 기독교인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성전의 새로운 주인이 오셨으므로 더 이상 예배당을 찾아 예배드리는 행위를 그치고 새로운 주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모셔 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천국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