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등불을 켜서 등경위에 두는 것은...?

거친반석 2014. 1. 5. 13:58

본문: 누가복음11:33-36

제목: 등불을 켜서 등경위에 두는 것은...?

 

등불을 켜서 높은 곳에 놓아두는 것은 그리로 들어오고 나가는 자들이 불빛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믿는 백성들 앞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는 것은 어둠속에 사는 인간들이 참 빛을 받고 나와서 밝은 빛아래서 살라는 뜻이다. 그러나 어둠이 본능적으로 빛을 싫어하듯이, 어둠속에 사는 인간들 또한 참 빛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에서 어둠속에서 살기를 좋아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규례에 따라 성전에 나가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만 드리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죄가 도말되어 온전케 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10:1)”

 

그러나 당시 어둠속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율법이 자신들에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무조건 성전에 나가 하나님 앞에 제사만 드리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죄가 도말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믿었다. 당시에도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던 랍비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를 두고 인간이 어둠속에 살고 있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들은 죄인(종)들로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당시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즐비 했지만, 그들 역시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찾아내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의 역할을 제대로 설명해 주신 분은 바로 예수가 오시고 나서부터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눅11:33)”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들 한분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반드시 나라는 존재가 죄로 인해서 한번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율법의 역할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 히브리서 저자나,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기록한 바울서신 역시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기록한 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어도 자신들 만큼은 하나님의 빛 아래서 산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빛아래 살기는커녕 되레 컴컴한 어둠속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다.” 등잔불이 밝은 빛을 내고 있는데 비해서 그 밑은 항상 어둡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성전에 나가서 하나님 이름을 불러도 결국 참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하게 되면, 믿는 자들 역시 어둠속을 벗어나지 못하게 됨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일은 비단 율법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성령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성령이 자신들에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 도통 알지 못한다.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역시 무조건 예배당에 나가서 예수 이름으로 예배만 드리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죄가 도말되어 모두가 구원에 이르는 줄 믿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 아니라는 사실은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고 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20)”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기독교인들은 계속해서 성령을 그리스도 영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령 받은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마귀가 성령을 그리스도 영이라고 철저히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인 성령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율법 역할을 하게 된다. 약2천년 동안 율법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그것으로 그들은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아무런 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게 되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동안 개, 돼지처럼 아무런 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법(성령의 법)을 받아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무수히 많다.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며 큰 교회를 운영하는 자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 역시 성령이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아는 자가 없다. 이는 마치 율법 학자들이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알지 못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모두가 예수의 참 빛 아래 살고 있다고 자부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을 보지 못하는 소경임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들 또한 등잔 밑이 어둡기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다.

 

오늘날 내노라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이런 사실을 알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만약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계셨더라면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셨을 것이고, 그리고 왜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는 가를 자세히 알려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자꾸만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하여 구원 받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리새인들이 율법으로 구원 받았다고 믿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는 마귀가 기독교인들을 교묘히 속이고 구원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어야 하는 결정적 이유는, 기독교인들 모두가 성령을 거역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를 믿고 모두가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성령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율법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성령을 거역한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성령을 거역한 죄를 해결 받지 못하게 되면 기독교인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한 죄는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성령을 거역한 것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 지은 자범죄에 해당한다. 개개인이 지은 자범죄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고, 오직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한다.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은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죄인이라 낮추고 오기 때문에, 이방인들 또한 자신을 죄인이라고 낮추지 않는 자들은 아들을 믿기가 쉽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께서는 의인을 구원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아들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방인들 앞에 하나님 아들로 오시는 자는 바울처럼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 죽고 다시 태어난 자이다. 따라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남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들은 대부분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과정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역자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낮추고 오는 자들을 모두 기쁘게 받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의 삶이요 인간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할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다.

 

그러나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거나 또는 자신이 속해있는 교단의 교리와 맞지 않으면 무조건 이단으로 정죄한다. 그리고 불신자들을 보면 무조건 마귀새끼로 정죄한다. 남을 정죄하는 자는 자신이 아직도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남을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마귀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심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니라(마23:2,3)”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남의 영혼을 구원하겠는가? 자신을 의롭다고 하던 바리새인들을 보라! 그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더러운 죄인이라며 멀리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아부하는 자들에게는 도리어 관용을 베풀었다. 당시 예수께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 모습을 보라! 그리스도와 같이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역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가 살펴보라! 기독교인들 역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에는 바리새인들 못지 않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사역을 펼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9,10)” 지금 도적 같이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은밀하게 훈련하고 계신다. 이제 잠시 잠깐후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곧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실 것이다. 

 

오늘도 도적같이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눅11:34,35)” 결국 그리스도의 눈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면,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주님께서 하신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고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