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장이의 권한!
본문: 예레미야18:1-12
제목: 토기장이의 권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고려청자는 세계가 놀랄 만큼 그 빛이 아름답고 영롱하여 많은 사람들이 탐을 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청자를 만드는 과정이 어찌나 까다롭고 힘들던지 온전한 청자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는 토기장이의 수만 번의 손길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한 청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토기장이가 정성들여 청자를 만들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토기장이는 가차 없이 그 토기들을 깨뜨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모든 그릇이 좋게 보일지 몰라도 토기장이 눈에는 그릇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토기를 깨뜨릴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토기장이의 손길에 달려있다. 어느 누구도 토기장이의 권한을 제한할 수는 없다. 설사, 1300도가 넘는 온도에서 구워진 청자가 자신을 깨뜨리지 말라고 애원해도 그의 목숨은 오직 토기장이의 손길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목숨도 하나님 손에 쥐어진 진흙 한 덩이와 같은 처지다. 그런데 인간이 그걸 모르고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줄 알고 우쭐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일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자신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우월감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토기장이가 하는 일을 자세히 보도록 말씀하신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집에 가서 그가 하는 일을 자세히 보고나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진흙 한 덩이가 토기장이의 손에 달려있음 같이 너희 이스라엘도 내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레미야는 비로소 하나님 뜻을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 뜻을 구구절절 설명한다. 하지만 목이 곧고 마음이 강퍅한 이스라엘은, 도리어 예레미야에게 헛소리 그만하라며 끝까지 죄악에서 돌이키길 거부한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는 극에 달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눈물과 한숨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리석은 인간의 말로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인간들 역시 하나님 손에 붙들린 진흙 한 덩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입으로는 모두가 먼지만도 못하고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막상 하나님 말씀이 자신에게 주어지면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살기 때문에 생기는 교만이다.
사도바울도 예수를 만나기전에는 자신을 의롭다고 하던 자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난후 180도로 변하여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그가 참 빛을 받아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깨달을 수 없다. 더군다나 법(죄)아래 사는 백성으로서는 자신의 존재를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래서 백성으로 살 때는 자신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교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고,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1)”며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과 우리 인간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존재가 되지 못함을 뜻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인간은 모두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이방인들에 비해서 자신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들만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자긍심에 모두가 마음이 높아져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다가 그만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을 믿지 못해서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이런 일은 오늘날 성령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의 교만은, 불신자들에 비해서 자신들은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과 구원의 증표로 성령까지 받고, 이제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속고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아들을 믿어야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듯이,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또한 하나님 보내주신 아들을 믿어야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 헌데 기독교인들이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속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이방인들 앞에 영적인 아들을 보내주신 적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아직 아들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하여 모두가 양자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다. 진실이 아닌 거짓을 믿게 되면, 사단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인간들을 속이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또한 현제 모두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를 믿지 못했는가? 그들의 마음을 사단이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위 말씀을 두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공중에 재림하시는 예수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또 다른 사람은 성령으로 오신 예수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또 다른 사람은 성경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두고 하는 소리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 되어 이방인들 앞에 영(말씀)으로 오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위 말씀을 해석하면, 예수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자신을 드리셨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인간의 원죄를 담당해주셨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라는’ 말씀은, 예수를 믿었던 이방인들도 예수 피로 말미암아 원죄는 해결 받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원죄는 해결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죄와 상관없다’는 표현을 쓰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예수 피로 말미암아 원죄는 해결 받았다 해도, 기독교인들 모두가 성령을 거역한 죄인들이다. 따라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 받으려면 아들을 기다려야 한다. 율법을 거역한 유대인들의 자범죄 문제를 해결해주시러 육체를 입고 예수가 오셨듯이, 이번에는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의 자범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영적인 아들이 오시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 ‘죄(원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자신의 죄를 다 사해주었다고 믿고 있으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해결해 주었던 죄는 첫 사람 아담이 지었던 원죄만 해결해 주신 것이다. 이방인들은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원죄를 해결 받았다는 증거로 성령을 받아 이제 겨우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된 사람들이다.
성령을 받아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곧장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의무가 따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체에 주신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하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마음속에 주신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온전히 성령을 따라 살자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모두 성령의 법을 어긴 죄를 짓게 되어 마지막에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이를 두고 기독교인들이 지은 자범죄라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마음속으로 지은 자범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 앞에도 하나님 아들이 오셔야 한다.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현제는 그리스도 영이 되어, 사도 바울 속에 빛(영)으로 들어가셨듯이, 이방인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의 마음속에 영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이방인들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오시는 아들을 믿어야 비로소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사함 받고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또한 유대인들처럼 자신을 의롭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으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으로 의로워졌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자신의 마음속의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주었는데, 성령으로 마음속의 죄를 깨달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령으로 구원받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불행한 것은,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높은 감투를 쓰지 못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며,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살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죽어가는 것이 가장 불행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만약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도 가장 불행한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를 아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고백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면, 모두가 사도바울처럼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셔보면 자신의 존재가 누구인가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아는 자는 절대 교만해질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을 절대 자랑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성령의 법 아래서는 제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고 성령 충만을 많이 받아도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자는 항상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여기기 때문에 당연히 마음이 교만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이 교만해지면 결국 사단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죽은 영의 지배를 받는 자는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산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주인으로 오셔야 하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