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구원 과정이 각각 다르다.

거친반석 2014. 1. 5. 14:09

본문: 로마서11:1-12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구원 과정이 각각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육체에 받은 백성이라 율법을 범하게 되면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육체에 병이 들게 된다. 이스라엘 땅에 유난히 병든 자가 많았던 이유는 모두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설사, 몸에 병이 들지 않았다하더라도 율법은 어느 누구도 온전히 지킬 자가 없다.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께서 자신을 찾아오는 자들의 병을 고쳐주셨던 것은 율법을 범한 자들의 죄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곧 그들에게는 구원이다.

 

좋은 예로, 중풍병자 하나가 침상에 누운 체 지붕을 뚫고 내려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참람하다며 어이없어 한다. 그들이 참람하다고 말했던 것은, “감히 인간 주제에 하나님이나 할 수 있는 말(죄 사함)을 함부로 지껄이느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께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던 것은, 예수께서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권세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음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미리 밝혀두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말씀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5:17)” 말 그대로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율법에서 자유케 하러 오신 것이다.

 

오늘날 중풍병자를 의학의 눈으로 보면 신경계통에 이상이 생겨서 발생하는 병으로 진단한다. 하지만, 당시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발병하는 병들은 대부분 율법을 범하여 생기는 병들이라, “죄를 사해주거나 혹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 주셨다” 죄와 귀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셨다는 말이나, 죄를 사해주고 병을 고쳐주셨다는 말이나 동격이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사역을 펼쳤던 것은, 율법 아래 갇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다. 이런 원리에 따라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모두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서 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태어난 것과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 이름만 부르면 구원인 것을, 자신이 갖고 있던 잘못된 고정관념이 결국 자신을 망하게 한 것이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5:39)”

 

유대인들이 믿지 않던 예수를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인들이 전도를 받고 단번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수가 흘려준 피의 댓가로 말미암아 믿는 이방인들에게 값없이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은 그것을 곧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하여 구원으로 받아들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로 여러 가지 이적과 표적을 보이고 있다. 그러자 그것을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가 펼치던 구원 사역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귀신)를 해결하고 펼치던 구원 사역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과는 전혀 다른 차원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가 하던 사역은,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펼치던 구원 사역이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로 펼치는 사역은, 불신자들을 하나님 백성 만들기 위해서 펼치는 전도 사역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율법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따로 전도할 필요가 없지만, 오늘날 이방인들은 불신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를 믿도록 해서 성령을 받아야 그나마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면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 무엇인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법이 바로 성령의 법이다. 성령의 법이란 믿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주신 영적인 율법이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8:10)”

 

물론 성경에는 성령이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영적인 율법이란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마치, 구약 성경에 메시아가 오신다는 말은 기록되어 있어도 구체적으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실이 후세 사람들을 통해서 밝혀졌듯이, 오늘날 이런 말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말씀이 사실대로 이루어질 때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믿게 될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실은 세례요한이 잠깐 동안 외치다가 목 베임을 당하고 나자, 그 후부터는 예수께서 직접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가 하나님이 보낸 아들이라는 사실을 곧이듣지 안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들이 와서 아무리 자신은 하나님이 보낸 아들이라고 외치고 다녀도 누구 하나 그를 믿어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경에 그런 말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께서 도적같이 오시겠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 말씀은 공중에 재림하는 예수를 두고 한 말이라며 곧이듣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이스라엘 땅에 보내주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율법 아래 가두어 둔 것처럼, 현재의 기독교인들 또한 영적인 아들이 오실 때까지 모두 성령의 법아래 가두어 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믿었다는 것과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하여 자신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인들 또한 유대인들처럼 장차 이방인들 앞에 보내주실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급속도로 타락하여 세상과 짝하며 사는 이유는, 바로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대로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라면,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오늘날 이토록 기독교인들이 타락으로 가지는 안았을 것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은 모두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 들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죄가 싹트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싹트는 죄를 성령의 법으로는 결코 다스릴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받기 위해서 성령 충만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성령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주러 오셨기 때문에, 믿는 자들이 하나님 법을 지키지 못하면 성령 충만은 사라지고 대신 마음이 병들게 된다. 마음이 병들게 되면 강퍅해진다. 강퍅해진 마음은 사단이 지배를 받게 되어 죽은 영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된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범할 때 몸에 병이 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 아래서는 어느 누구라도 법을 따라 살 수 없으므로 모두 타락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는 사실 하나님이 원하시던 목적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야 믿는 백성 모두를 죄 아래 가두어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법아래 사는 백성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그런 사실을 몰라서 망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또한 당시 유대인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제 이방인들 앞에 도적같이 오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기독교인들에게 미리 알려서 한 사람이라도 멸망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고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름실과로 그리고 이방인들을 가을 추수 때 거둬들일 알곡으로 부르는 것은 그만큼 알곡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적같이 오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통해서 계속해서 열심히 외치고 계신다. 그러나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예수 믿고 성령까지 받아 모두 구원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8:7)” 유대인들처럼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게 되면, 기독교인들 또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지 못하여 멸망으로 가게 될 것이다. 부디 기독교인들만큼은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범치 말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