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라!
본문: 고린도전서13:1-13
제목: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라!
사도 바울은 고전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말하다가 갑자기 고전1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왜 바울은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 사랑을 구분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이는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한 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과 그리스도 영이 동일한 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증거를 고전12장과 고전13장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성령은 아버지 영이요 하나님 영이라고 성경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마10:20참조). 성령이 아버지 영이라면, 그리스도 영은 아들의 영이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양자의 영”을 받아야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했던 말도 바로 그리스도 영을 두고 한 말이다.
사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계속해서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한 영으로 보고 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인들이 성령만 받으면 모두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으로 믿고 있다.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하는 순간! 기독교인들의 구원은 컴컴한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말게 된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독교인들이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시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성령(율법)과 그리스도 영(복음)을 동일한 영으로 보지 않으면,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들 역시 율법과 복음을 분리하게 되면, 그들 또한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이나,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사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구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율법으로 구원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법아래서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영적인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를 모르고 성령(율법)으로 모두 구원 받았다고 믿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일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던 것과 같은 이치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착각은 마귀로 하여금 거짓을 사실로 믿게 만들어서 영영 마귀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로 주신 것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각 지체임을 말하고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이를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여러 지체가 있는데, 어떤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몸통역할을 하는 은사를 주셨고, 어떤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손발역할을 하는 은사를 주셨으며, 또 다른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머리역할을 하는 은사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지체를 각 사람들에게 나눠주신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이런 은사를 받았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것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것에 참여하려면,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비로소 온전한 것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현제 영적인 율법아래 살고 있는 백성에 불과하다. 백성은 아직도 죄 아래 살고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바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주신 “성령의 법”을 거역한 죄다. 기독교인들 모두가 이대로 죽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한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이방인들 앞에도 하나님 아들이 오시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았으면, 바울은 굳이 고전13장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것이 아니므로 고전13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각 지체를 부분적으로 나눠준 것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려면 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만 가능해진다.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이 말은, 곧 성령의 은사로 제아무리 큰 능력을 나타내고 또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리는 이적을 보인다 할지라도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코 비교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마치 아파트를 분양하기 위하여 모델하우스로 지은 거푸집과 실제로 지은 아파트를 비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고 하여, 성령을 무시하고 그리스도를 더 위에 두자는 말이 아니다.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인에게 알 맞는 율법과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글을 기록하고 있다.
성령은 기독교인들에게 법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죄를 깨닫게 할뿐 결코 기독교인들을 거듭나게 하지 못한다.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깨닫게 할뿐 그들을 거듭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믿게 되면, 그때부터 거짓의 아비 마귀의 하수인이 된다.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죽은 영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둔갑시켜서 인간들에게 구원 받았다고 속이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런 꾐에 빠져 결국 예수를 믿지 못하고 멸망으로 갔던 것이다.
현제 성령의 법아래 사는 기독인들은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라서 성령의 법으로는 기독교인들이 결코 거듭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거듭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법은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할뿐, 인간을 거듭나게 하지 못한다고 성경은 누차 강조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거듭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났다고 믿고 있다가 예수를 믿지 못하여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저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 자신을 거룩하다고 일컫던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들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고 그들을 멀리하고 정죄했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 역시 같은 형제들을 자신의 교리와 맞지 않는다고 하여 무조건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는 마귀새끼라며 상종도 안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양자의 영(그리스도 영)을 받은 자는, 자기 생각이나 혹은 자신이 속해 있는 교단교리와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인간들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영을 받은 자는 예수께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겼던 것처럼, 누구든지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며 손들고 오는 자들을 사랑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불신자로 살던 자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아들 앞으로 달려 나오기만 하면 그들의 모든 죄까지도 사해줘서 천국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 난자가 펼치는 구원 사역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사랑을 실천한답시고, 곳곳에 급식소를 설치하여 노숙자나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세상 적으로 보면 대단히 칭찬 받을만한 일이다 그리고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본질은 아니다.
바울이 성령의 은사와 비교하여 그리스도 사랑을 기록한 것도 바로 이런 내용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을 직역하면, 기독교인들이 그동안 길거리에서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일을 하고, 또는 불쌍한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도와주었다 할지라도 “내속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 유익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이 하는 일 모두가 육신적인 사랑을 전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도 하나님 백성을 만들기 위한 전도 차원이라면 아주 좋은 효과를 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예수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셨다는 것을 예로 들어, 자신들이 하는 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떡을 나눠준 사건은, 사흘이나 굶주린 그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서 먹을 것을 나눠준 것이지, 그들에게 결코 떡이나 물고기를 나눠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 하는 말씀이 바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16:6)”고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기독교인들 앞에 보내주시는 목적은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함이지, 결코 굶주린 인간들에게 밥을 제공하거나 또는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보내주시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밥을 주실 수도 있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봐주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아들이 오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성령의 법을 거역한 죄인(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사랑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밥을 나눠주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기독교인들 앞에 그리스도가 굳이 다시 오실 필요가 없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지금 모두 성령을 거역한 죄인들이라서 반드시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 백성 만들기 위한 전도차원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육신의 일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16:6)”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로 하고 있는 일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어떻게 다른지 바로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혹자는 이런 글을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혹자는 성령 아래서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아 큰 이적과 표적을 나타나기도 했었다.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많은 병들을 고쳐주기도 했다. 고아원 양로원 할 것 없이 불쌍한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나도 그리스도 영을 받기 전까지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인줄 알았다. 하지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날 갑자기 빛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후부터는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그동안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받고 체험한 것을 말하는 것이니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후 지금까지 내가 얻은 결론은 기독교인들 모두가 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도 몇 번이나 성경에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가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늘 보좌에 영으로 계신 예수께서 이방인들 앞에 오실 때는 사람을 통해서 오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한다. 바울이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가 그리스도 사역을 펼쳤던 것처럼,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그리스도 역시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오시는 것이다. 혹시 기독교인들이 영화에 나오는 예수를 생각하여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아들도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는 십중팔구 거짓 목사와 적그리스도 영을 받은 자에게 속을 수 있다.
이방인들 앞에 영으로 오시는 아들은 성경이 기록한대로 거친 반석(다듬지 않은 돌)과도 같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그의 외모만 보고 믿다가는 도리어 실족할 수 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롬9:33)”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그의 외모를 보고 믿으려 하지 말고, 그가 하시는 말씀을 마음으로 새겨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반드시 성경말씀과 비교하여 말씀이 그러한가? 아니한가를 철저히 따져보고 믿어야 실족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소문난 잔치에 먹을 없고, 요란한 깡통이 소리가 크다’는 말이 있다. 속이 비어있을수록 요란한 소리를 낸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한 교회일수록 건물내부를 화려하게 꾸며서 그런 것들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 역시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없는 자들일수록 겉모습을 후덕하고 인자하게 꾸민 다음 달콤한 말로 영혼들을 미혹하고 있다. 또한 세상 지식이나 학문 따위로 성경을 잣대질하는 자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렇게 거짓 목사들이 전하는 달콤한 말에 넘어가는 자들은 결국 자기 영혼을 마귀에게 팔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은 결코 인간들에게 달콤한 말을 전하지 않는다. 현제 기독교인들 모두가 성령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하는데, 어떻게 달콤한 말로 교인들에게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기독교인들 앞에 오시는 하나님 아들은 먼저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을 거역한 죄에 대하여 물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 숨은 악령의 정체 또한 드러낼 것이다. 그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하는 자들은 아들 앞을 떠날 것이나, 자신의 정체를 악의 존재로 시인하는 자들은 아들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결국 기독교인들 모두가 울리는 꽹과리가 되지 않으려면,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하나님 아들을 믿고 모두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비로소 속이 꽉 찬 알토란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법 아래서는 누가 알곡이고 누가 쭉정인지 아직 알 수 없다.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어느 누가 아들을 믿고 나오느냐에 따라서 알곡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쭉정이로 전략할 수도 있다.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도 결국 예수가 오시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알곡과 쭉정이를 알 수 있었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