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 완성 된다.

거친반석 2014. 1. 5. 14:46

본문: 야고보서2:14-26

제목: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 완성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말로만 믿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행동으로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앵무새처럼 입술로만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입술로 믿는 하나님은 ‘죽은 믿음’이요 ‘죽은 믿음’으로는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야고보가 말 한대로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뒤 따라야 한다.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죽은 믿음’에는 하나님의 어떤 역사도 뒤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가 뒤 따르지 않다보니 그런 자에게는 ‘믿음’ 또한 자라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지 않다보면, 결국에는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즉각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뒤 따른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 순종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뒤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 역사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되면, 어느 누구라도 자기 속에서 ‘믿음’이 점점 자라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아브라함처럼 아들도 받치는 ‘큰 믿음’을 선보이게 되는 것이다.

 

야보고가 말한 “행함이란” 바로 이렇게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행함’을 보일 때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가 과연 그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냐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으로 직접 받은 말씀이 아니라면, 아무리 말씀을 그럴듯한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이냐 아니면, 인간이 자기 생각으로 전하는 말이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는 크게 달라진다.

 

인간이 자기 생각으로 전하는 말이라면 아무리 큰 교회 목사가 전하는 말이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 교회 성도들은 아무리 교회를 오랫동안 다닌 사람이라도 ‘믿음’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영생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란 성령의 은사로 병 고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숨은 죄악을 들추어내서 그리스도 앞으로 안내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교회 목사가 전하는 말이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통해 전하는 말씀이라면, 반드시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면 성도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되어 자기가 왜 하나님이 보낸 아들 앞으로 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다. 아들을 만나 자신의 속사정을 아뢰게 되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이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점점 자라게 되고, 결국에는 기생 라합처럼 ‘큰 믿음’을 보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족보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런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떤 ‘믿음’을 소유하고 있을까? 외람되게도 현제는 모두 ‘죽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 기독교인들 귀에는 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기독교인들의 죽어 있는 믿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기독교인들이 ‘죽은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해줄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성령의 은사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있다고는 하나, 현제는 그들도 모두 타락하여, 성령의 뜻을 거역하고 사람들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 명예와 부(富)를 쌓기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그들 입을 통해서 더 이상 하나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 성령의 은사로 쓰임 받던 종들마저 타락하여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해줄 자가 없게 되자, 그들 밑에서 말씀을 듣던 교인들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점점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때 기독교인들이 야고보서를 보고 살아있는 ‘믿음’이란 곧 ‘행함’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부랴부랴 ‘행함’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 앞에 ‘행함’을 보이려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을 하다 다시 성경을 찾아보니, 성경에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이 있어서 거기에 맞게 ‘행함’을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행함’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여기저기서 펼치고 있는 길거리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사역이다. 그 전에는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행함’을 보였으나, 요즘은 좀 더 적극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도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행함’을 요구하시는 것일까? 기독교인들은 현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생각을 표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댓가도 없이 뙤약볕에서 수고 하는 그분들에게는 참으로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아브라함이나 기생 라합이 그런 일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조상’이라고 극찬 받지 않았다. 만약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노숙자들에게 밥 퍼주는 일이나, 또는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하여 봉사하는 일을 하고, 믿음의 조상이란 칭호를 얻었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세상 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있다. 세상사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고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도 아니다. 자고로 ‘믿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을 듣고 즉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미 성령으로 쓰임 받던 종들마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등지고 말았는데, 누구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의 행함’을 보이겠는가?

 

기독교들로서는 굉장히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오랫동안 밥 퍼주는 일을 계속할지라도, 또한 아무리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돌보아줄지라도, 그런 행위는 하나님이 직접 시켜서 한일도 아니고 순전히 기독교인들 스스로 자기 생각에 젖어서 한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물며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그냥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의 생물들을 자라나게 하는데,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어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자라게 되고, 자란 ‘믿음’은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더 나아가 자기를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유대인들도 처음 율법을 받았을 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도 육신의 소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말았다.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더 이상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 말씀이 들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황하여 안절부절 못하던 차에,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줄기 빛이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역시 켜는 등불에 불과할 뿐 참 빛은 아니었다. 그러다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올라오는 예수에게 성령이 임하자, 비로소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어느 누구도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없었다. 이는 유대인들 모두가 타락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기독교인들 역시 예수 이름을 부르고 처음 성령을 받을 때만 하더라도 모두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역시 마음이 부패하여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하나님과 멀어지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자기 생각을 따라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요즘은 성령의 역사보다는 사단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기독교인들을 교묘하게 속이고 하나님 음성이라며 생명도 없는 말씀들을 들려주고 있다.

 

사단이 인간을 통해서 전하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런데 영분별이 안 되는 기독교인들로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신념’만 자라고 있는 것이다. ‘신념’이란 아무렇게나 살아도 예수 이름만 부르면 천국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육신적 ‘믿음’이다.

 

무슬림들이 폭탄을 들고 적진에 뛰어 들어 죽으면 ‘알라’가 데려간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념’에서 나온 ‘믿음’이다. 어떻게 나쁜 짓을 하는데도 천국갈 수 있다고 믿는지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다보니 악을 행하는 데도 천국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자신의 마음속에 악이 가득한데도 예수를 믿었으니까 천국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는 마치, 무슬림들이 폭탄을 갖고 적진에 뛰어 들어 죽으면 무조건 ‘알라’가 데려간다고 믿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제 기독교인들의 타락으로 인해서 앞으로 더 이상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과 같은 자를 통해서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유대인들도 타락하여 하나님 말씀이 들려오지 않았을 때,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셔서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셨듯이, 이제 기독교인들 역시 모두가 성령을 거슬려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공평하게 이방인들 앞에도 마지막으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하나님 말씀이 들려주게 될 것이다.

 

그때 기독교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아들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불순종은 사단의 말을 듣고 살겠다는 뜻이며,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항거이기도 하다. ‘믿음’은 아들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즉시 ‘행함’을 보일 때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점점 자라나게 된다. 그렇게 하여 자라난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물론이요 그것으로 자신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구원’은 자신의 문제를 들고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 나갈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 앞에서 해결하라고 당신을 아들을 인간 세상에 보내주셨기 때문에 반드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이라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 율법 아래 살던 자들은 육체를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영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서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

 

‘믿음’은 이렇게 반드시 ‘행함’을 통해서 결실을 맺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믿는다고 말해놓고, 기독교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이 또한 ‘죽은 믿음’이다.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믿었다면,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도 믿어야 살아 있는 ‘믿음’의 소유자라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시는 과정은 이 앞전 주일 설교 말씀에서 자세히 밝혀두었다. 그것을 참고 하여 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비로소 온전한 ‘믿음’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자들이 바로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족보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