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거친반석 2014. 1. 5. 14:49

본문: 로마서5:12-21

제목: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바울의 이 말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사망에 이르게 한 이 죄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다 하늘에서 내어 쫓긴 마귀로부터 온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예수께서도 마귀를 두고 처음부터 범죄 한자요 살인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런 마귀를 심판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이 세상은 마귀를 가두어 두기 위한 장소에 불과하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는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안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안했다’는 말은, 율법이 없을 때는 양심에 느끼는 가책 정도를 가지고 죄의 유무를 판단했으나, 율법이 오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 모두를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기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죄 아래 살고 있었지만, 율법을 주기 전에는 그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합법적으로 죄 아래 가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합법적으로 죄 아래 가둘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기 위함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아래 살 때는 사실 고통스럽다. 하나님의 법은 세상 법과 달라서 열 번 잘 하다가 단 한번만 잘못해도 모든 죄를 범하게 되어 심판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법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서 몸에 병이 들어 고통을 당하거나 때로는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던 것이다. 하나님 법에는 용서가 없기 때문에 인간들로서는 무서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분명 무서운 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 가두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2천년 역사가 끝나갈 무렵 당신의 아들을 이스라엘 땅에 보내주신다. 법아래 살 때는 그토록 엄하고 무서웠던 분께서, 이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마귀를 멸하고, 그동안 마귀의 발아래서 신음하고 있던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들이 오신 이후부터는 어느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들고 아들 앞으로 달려 나오기만 하면 모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우매함은 하나님이 목적했던 바와는 정 반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의인(義人)이요 못 지키는 자는 죄인(罪人)으로 분류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는데,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의인이요 못 지키는 자는 죄인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당시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생각으로 의인과 죄인을 구분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인간의 생각으로 구원 받은 자와 구원 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고 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를 제대로 알려주었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를 그토록 배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다보니, 인간의 생각으로 율법을 지킨 자는 의인(義人)이요 못 지킨 자는 죄인(罪人)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막상 예수가 오셨을 때,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었으나, 자신을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가 예수를 배척하고 말았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율법사, 관원, 랍비)대부분이 바리새파 출신들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바리새파 출신이라 말하고 있다. 당시 그들을 두고 의인(義人)이라 불렀다. 반면에 로마의 앞잡이로 살던 세리와 몸을 팔던 창기들은 죄인(罪人)이라 불렀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로 몸이 병들었던 자들 모두가 죄인들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듯, 죄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준 아들을 믿었으나, 의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준 아들을 믿지 않아서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을 개, 돼지 같은 사람들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개가 토한 것을 도로 주워 먹듯이 이방인들이 날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돼지가 날마다 똥 위에서 자고 먹듯이, 이방인들 또한 날마다 죄악 속에서 먹고 마시며 살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속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겉으로 지은 죄를 해결 받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마음속으로 지은 죄를 해결 받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도 부패한 이방인들 마음속에서 죄를 찾아내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죄를 그리 크게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성령을 받기 전에 느끼는 죄라고 해봐야 겨우 양심에서 느끼는 가책 정도를 가지고 죄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보니,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모든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성령의 법 아래서는 자신의 죄를 깨달아 가는 것이 최고의 신앙이다. 그래야 장차 오실 하나님 아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본인의 마음속에서 죄악을 깨달아 가라고 주신 성령(법)을 ‘구원의 영’(그리스도 영)으로 잘못 알고 모두가 구원 받았다며 우쭐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인들 또한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게 된다.

 

본인은 약 40년 동안 불신자로 살다가 예수를 믿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느끼는 죄악의 깊이를 잘 알고 있다. 그때 본인이 느꼈던 죄악의 깊이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정도가 죄의 전부였다. 그러나 양심의 법은 죄를 짓는 정도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기 때문에 자신을 바로 세울 수가 없다. 세상에도 인간들이 만든 법이 있다. 하지만 세상 법은 인간의 판단에 따라 죄의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형평성에서 문제가 많다.

 

불신자로 살던 본인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고 보니 그때서야 내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들이 다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죄악(미움, 시기, 질투, 음란, 분노, 탐욕)들 때문에 성령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주일이 멀다하고 금식하며 마음에서 올라오는 죄악들을 떨쳐 보려했지만 그때 뿐, 또 다시 음식물이 몸에 제공되면 어김없이 육신의 소욕들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죄악으로 인해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주님을 만났던 것처럼, 본인에게도 그리스도께서 영(빛)으로 내 마음속에 들어오시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영으로 내 마음속에 들어오시고 나자 비로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도 바울처럼 죄에서 자유를 얻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 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본인에게 특별히 이런 ‘은혜’(그리스도 영)을 베풀어주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을 모두 율법아래 가둔 다음, 아들을 보내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기독교인 모두를 성령의 법아래 가둔 다음, 영적인 아들을 보내서 기독교인들을 ‘자범죄’(성령을 거역한 죄)에게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다.

 

그런데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무슨 의미로 율법을 주셨는지 그것을 백성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고 멸망으로 갔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께서 무슨 의미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는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가르쳐 주는 자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만 알 뿐,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지 못할 큰 위험에 처해있다. 결국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영’을 받은 하나님 아들이 오셔야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주게 되리라!

 

바울은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더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고 모두를 죽이려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는 그런 뜻이 아니고, 아들로 말미암아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은 죄악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 주셨다. 이를 기독교인 입장에서 들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죄 아래 가두고 모두를 죽으려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그런 뜻이 아니고, 영적인 아들을 보내서 기독교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베푸시는 마지막 사랑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어리석게도 자신은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방인들의 죄를 깨닫게 할 목적으로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법은 기독교인 마음속에 숨은 죄를 들어나게 할뿐 기독교인들을 결코 온전케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계속해서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인들 역시 바리새인들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왕궁에서 일하다가 왕실의 물건이 탐이 나서 그것을 훔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서 금방 탄로 나고 말았다. 왕실 법은 당장 그런 자를 죽이라고 되어 있다. 왕은 그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한다. 왕자가 그 소식을 듣고 아버지께 강청하여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한다. 왕은 왕자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그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 않았다. 영락없이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 사람은 왕자의 은혜를 입고 다시 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모두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성령을 거역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법은 용서가 없기 때문에,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죽을 처지에 놓여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아들이 듣고, 아버지께 강청하여 성령의 법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의 간곡한 청을 듣고, 기독교인들의 죄 문제를 모두 아들에게 일임하셨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가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신 아들 앞으로 달려가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거역한 죄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용서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게 되면 모두가 지옥 불 못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무서운 분이지만,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죄인들을 살려주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