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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거친반석 2014. 1. 5. 14:53

본문: 마태복음12:46-50

제목: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이제 곧 추석명절이 다가온다.

그동안 고향을 떠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부모형제를 만나기 위해 고향을 찾는다. 길이 막히고 힘이 들어도 고향을 찾는 이유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다시 회귀하듯, 인간들 또한 본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항상 인간 중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추석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는 일이다. 사람들이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이미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지만, 자꾸만 사람들이 조상들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일반 사람들이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이 복 받는 길이라 생각하여 아무 거리낌 없이 절을 하고 복을 빈다. 하지만,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독교인들은 차례대신 ‘추도식’을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절만 하지 않을 뿐 그 속내는 일반인들이 드리는 차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추도식은 기독교인들이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들어내놓고 차례를 지낼 수 없으니까 예배라는 형식을 취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죽은 조상들에게 절하는 것을 곧 귀신에게 절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드리는 추도식은, 예배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역시 예배라는 형식만 취할 뿐 불신자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죽은 영’이 도사리고 있다는 증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가족들 중에서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갔다면, 명절 때 굳이 추도식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자꾸만 죽은 조상들을 위해서 예배라는 형식을 빌려서 추도식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뭔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믿는 자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만약 믿는 자들 마음속에 그리스도(천국의 주인)가 계시다면, 절대 추도식을 할 수 없다. 죽은 자들을 위해서 예배드리는 것은 곧 귀신에게 절하는 것이이 때문이다. 조상들이 예수 믿고 천국에 갔다면 우리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기독교인들이 추도식을 하는 것은 무언가 자신의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이 추도식을 계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마음속에 죄악이 가득하다는 증거다. 죄악이 가득한 그곳에는 죄악을 먹고 사는 ‘죽은 영’도 함께 존재한다. ‘죽은 영’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의 본질이 악하다고 하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죽은 영’은 인간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세상 것을 탐하도록 유혹한다. 인간들이 한평생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죽은 영’의 활동 때문이다.

 

믿는 자들 마음속에 ‘산 영’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면, 인간들이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어 다시는 사망이 그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나, ‘산 영’ 대신 ‘죽은 영’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보니, 인간들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날마다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 불안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믿는 자들이 세상 것을 붙잡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 하신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 땅은 사람 살 곳이 못 되기 때문이다. 왜 이 땅은 사람 살 곳이 못되는가? 이 땅은 죽은 자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란?’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이 ‘죽은 영’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땅에 사는 어느 누구도 '죽은 영'의 지배를 벗어나서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이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모두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던 예수가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하늘에 오르신 후,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영적인 분이 되신 후, 최초로 빛(영)으로 바울 마음속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또 다시 예수께서 영으로 바울같은 자를 통해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시는 이유는, ‘죽은 영’의 지배를 받고 사는 모든 이방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기 위해서다.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서 약2천년 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살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단의 자식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한 말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 역시 약2천년 동안 성령의 법아래 살았지만,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악이 가득하다. 죄악이 가득하다는 말은 사단(죽은 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죽은 영’이 함께 하고 있는 한, 기독교인들은 결코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죄인들이다. 기독교인들이 명절 때만 되면 조상들에게 추도식을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모두 ‘죽은 영’의 가르침을 쫒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하게 되면, 당연히 세상 풍습을 쫓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짝하며 타락으로 가는 이유도 기독교인들 모두가 ‘죽은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세상 것들을 가지고 믿는 자들을 유혹한다. 그래서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탐하게 되면 그런 자는 사단의 하수인이 되고 만다. 사단은 세상 것을 던져주면서 천하고 낮은 곳에 오신 아들을 믿지 말라고 속삭인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은 바로 세상 것을 꽉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재계를 주름 잡고 있는 대부분의 그룹총수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우리는 세상 것과 하나님 것을 잘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크다고해서 혹은 교인 숫자가 많다고 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천국가기 위해서 불신자들 가운데서 예수의 초청장을 받고 온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의 초청장을 받고 온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이 이방인들 앞에 보내주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를 두고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는 것이다. 천국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기독교인)이 예수의 초청장을 받고 왔지만,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지 않아 아들로부터 ‘예복’(택함) 받지 못해서 결국 천국에서도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에 고향을 찾아 가시는 분들은 오늘 본문 말씀을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많은 무리들을 향해서 열심히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예수께 고하기를 “지금 밖에 선생님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 왔나이다”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말씀하신다. 윤리적으로 보면 예수는 참으로 매정한 분이다. 어떻게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저런 식으로 대할 수 있을까 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의 생각으로 하늘나라 일을 곡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말씀 하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는 말은, 육신으로 맺은 혈연관계는 결코 진정한 부모 형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들이 아들을 믿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보낸 자를 믿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거꾸로 되짚어 보면, 아무리 내 혈육이라도 하나님이 보낸 자를 믿지 않는 자는 ‘내 형제도 아니고 내 자매도 아니며 내 모친도’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 이치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그러나 이는 하늘나라에서만 통하는 말이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인간의 감정이나 인정 따위에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결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들도 문전 박대하였다. 비록 자기를 낳아준 부모라도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혈육이라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는 다면 그런 자를 ‘내 부모요 내 형제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눈곱만큼도 허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 땅에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약12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낸 아들이 이 명절에 우리를 찾아 오셨다고 할 때, 과연 부모 형제를 버리고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 갈자가 몇이나 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 형제를 먼저 찾아뵙고 그 다음에 주님 앞으로 달려 나가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보다는 혈육의 정을 먼저 앞세우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일꾼들을 보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안위를 먼저 돌보던 자들이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 한마디에 본토 천척아비 집을 미련 없이 떠났으며, 자기 아들이라도 기꺼이 하나님 앞에 받쳤다. 열두 제자들은 아비와 어미를 뒤로 하고, 그리고 고기 잡던 배와 그물마저도 모두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반드시 욕을 먹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부모 형제보다는 주님을 먼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은 결코 주님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이를 직역하면, 현제 성령의 법아래서 신앙생활 하는 기독교인들은 영생하고는 관계없이 그저 하나님 법을 지키며 사는 일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건데 생명얻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예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말씀은, 부모와 형제와 그리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모두 버리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현제 어떻게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가? 스스로가 답을 내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