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와 그리스도의 은혜!
본문: 로마서3:19-31
제목: 성령세례와 그리스도의 은혜!
기독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현제는 모두가 성령의 법아래서 살고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현제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아직 기독교인들은 영적으로 오신 하나님 아들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모두 동일한 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삼위일체 안에서 보면, 성령과 그리스도 역시 모두 하나님 안에 속해 있다. 그러나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가정에도 위계질서가 있듯이, 하늘나라에도 위계질서가 있다. 하늘나라 위계질서는 땅위의 위계질서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 그래서 성령이 하시는 일이 따로 있고, 아들이 하시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다(마10:20참조) 그리고 아들은 그리스도 영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을 주러 오셨다면,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신 하나님 아들은 ‘영적인 율법’ 아래 갇힌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러 오시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혼동하게 되면 구원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법아래서 살다보니, 모든 것을 성령으로만 해결하려 한다. 그래서 성령만 받으면 무조건 구원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받은 성령은 ‘영적인 율법’을 마음속에 받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령으로는 기독교인들 어느 누구도 온전케 될 수 없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온전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한 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한 영으로 보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성경 말씀을 부정하게 된다. “법은 죄를 깨닫게 할뿐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다(히10:1)”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예수의 피’ 흘림을 통하여 ‘원죄’를 사함 받았다는 증거로 성령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믿는 자’(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을 보내 주신 것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보내주신 것과 같은 이치다.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음으로서 하나님 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도 비로소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율법’을 마음속에 받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법아래서 사는 것과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 은혜아래서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성령은 이방인들에게 법을 주러 오셨기 때문에 단 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래서 처음 성령을 받게 되면 불같이 뜨겁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점점 식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처음에 성령을 받았던 그 감격(성령충만)을 느껴보기 위해서 금식기도를 해보지만 그때뿐 절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이런 일은 세상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게 생겼다. 그때 길을 가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여 후하게 사례까지 한다. 그리고 매년마다 선물을 보내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도 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뇌가 그것을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신이 물에 빠져야 하고, 그때마다 그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을 건져 주어야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 사람을 기억하고 그 은혜를 잊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건이 단 회적으로 끝나버리고 말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그 사건은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은혜(恩惠)의 사전적 의미는, 누군가 자신에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을 말한다. 이 세상에도 이런 은혜를 베푸는 자들이 많이 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가 있고,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베푼 은혜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은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 속에 머물다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은혜(恩惠)도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누리는 은혜(恩惠)이다.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게 되면 그 은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아까 위에서 말한 대로 인간을 통해서 느끼는 은혜는 단 회적으로 끝나버리고 말기 때문에 그것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하고 곧 잊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느끼는 은혜는 인간이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느끼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혜(恩惠)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죄인(罪人)이란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바울이 율법아래 살 때는 자신을 의인(義人)으로 생각했으나, 예수를 만나고보니 비로소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성령의 법아래 살다가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게 되면, 바울처럼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罪人)이란 사실조차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부지수로 많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은혜(恩惠)를 말하고 있다.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모르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은혜는, 아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었을 때처럼 세상적인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자신의 죄를 전제조건으로 하지 않고 말하는 은혜는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이렇게 받은 은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는 내용을 듣고 그 말씀에 감격하여 눈물 흘리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질병이 나았다며 어쩔 줄을 모르며 기뻐한다. 목사가 성도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라도 하면 성도들은 그 말씀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그것을 은혜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은혜는 모두가 세상에서 말하는 은혜로서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 곧 잊어지고 만다. 그들이 받은 은혜는 인간의 생각 속에 머물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곧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게 된다.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영적인 율법’을 주러 오셨기 때문에 단 회적 사건으로 끝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恩惠)는 단 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한 우리는 이 땅에서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 수가 없다.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 이름을 부르지만, 우리가 날마다 짓는 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죄의 삯은 사망(死亡)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이때로 끝난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우리가 죄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내 마음속에 들어오셔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의 삶이다.
다음은 본인이 성령아래 살다가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만난 후 깨달은 내용이다. 40년을 마귀 발아래 살던 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불같은 성령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성령께서 여러 가지 많은 은사를 선물로 보내주셔서, 성령의 은사로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었다. 본인도 성령 아래서 살 때는 나도 내가 틀림없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줄 알았다. 그리고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요 그리스도가 성령인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그리스도께서 빛(영)으로 내 마음속에 찾아오셨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영)으로 예수를 만났던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성령을 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속에 들어오고 보니, 내가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가 아니라, 그때까지도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어둠속에 살던 내가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통하여 비로소 내가 말할 수 없는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때부터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 구구절절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죄인이 되고 보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도 민망하였다. 그동안 성령의 법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고, 신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배설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의 은혜(恩惠)를 먼저 경험한 자로서, 그리스도의 은혜(恩惠)를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어떤 사람이 죽을병에 걸렸는데 하루라도 ‘생명을 연장하는 약’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 또한 단 하루라도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가 없기에 그리스도라는 ‘은혜의 보약’을 단 하루라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쉽게 말해서,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단 몇 분도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온전히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보니, 그리스도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 일본의 방사능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방사능에 노출되면 인간이 당장 죽는 것이 아니라 적혈구가 파괴되어 서서히 죽어간다고 한다. 오늘날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방사능 앞에서 과학도 속수무책이다. 계시록에 기록된 예언들을 보면 앞으로 이보다 훨씬 더 무서운 재앙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목숨이 파리 목숨과 같은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재앙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악의 근성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 사망(死亡)이라는 말은, 인간으로 태어나 죄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 불에 던져 진다는 말이다. 방사능은 피폭지역에서 벗어나면 살 수 있다. 재앙도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운 좋으면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죄악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자신이 지은 죄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죽으면 방사능보다 더 무서운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죄악을 치료해주실 분이 오직 그리스도 한분뿐이다. 우리는 그분을 믿어야 한다. 그럼 방사능보다도 더한 재앙 속에서도 살아날 수가 있다.
이스라엘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가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시는 과정은 이렇다. 이스라엘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는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산영’이 되셨다.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가 다시 말씀(영)이 되신 것이다. ‘산영’으로 계신 예수가 인간 최초로 바울의 마음속에 빛(영)으로 들어가셨다.
기독교인은 믿기 어렵겠지만, 바울은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그래서 열두 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던 것은, 이방인들 앞에 보낼 그리스도를 미리 ‘예표’에 주기 위해서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이 도사리고 있다. 이 ‘죽은 영’을 ‘산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몰아내고 그리스도가 인간의 주인이 되어 주셔야 한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이런 말이 쉽게 이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실 때에는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영으로 오시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사함 받고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고 배척했듯이,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지 못하고 배척하게 될 것이다. 바리새인들처럼 교만한 자들이 예수를 배척했듯이, 오늘날에도 높은 감투를 쓰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 아들을 배척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영으로 오신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가 자기 마음속에 주인으로 들어오시게 되면, 그때부터 그리스도의 은혜(恩惠)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성령아래 살 때 하던 짓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 짓을 하고 있었는가를 구구절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도를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이런 말이 전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바울이 율법아래 살 때는 그토록 기고만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했던가를 떠올려 본다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이다.
성령은 이방인들에게 영적인 율법을 주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단 회적사건으로 끝났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또 다시 그날의 감격(성령충만)을 맛보기 위해서 날마다 울며불며 금식하고 있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성령은 기독교인들에게 법을 주러 오셨기 때문에, 성령을 처음 받던 그날의 감격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의 임무는 이제 모두 끝났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길뿐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최고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내안에 모시는 일이다. 바울은 “네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가 확인해보라! 만약 그리스도가 네 안에 없다면 너는 버리운 자라고 말한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