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라!
본문: 에베소서4:1-16
제목: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라!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이를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에베소 교인들로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난 교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 이름을 부르고 이제 겨우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초보적 신앙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고 바울처럼 온전히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나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 받은 것을 가지고, 바울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불신자로 살 때, 어느 누군가로부터 전도를 받아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 에베소 교인들처럼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초보적 신앙인들이다. 초보적 신앙인이란?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아직도 하나님 법아래 살고 있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 법아래 살고 있다는 말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로서, 아직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에베소 교인들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아직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믿게 되면, 마귀가 인간을 속이고 하나님 노릇을 하게 된다. 바리새인들 경우에서 보듯이, 자신이 아직 구원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예수 앞에서 구원 받았다고 우기게 되면, 귀신이 인간을 속이고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우기게 되면, 악한 영이 인간을 속이고 거짓을 진리로 믿게 만들어 버린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대적했던 것도 모두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에베소 교인들이 자신들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믿었던 것은,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자꾸만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는 이유는,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번 드리는 말씀이지만, 성령은 예수의 영이 아니고 아버지의 영이다. 예수도 분명히 성령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마10:20참조). 인간들이 악한 영에게 속는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삼위(성부, 성자, 성령)가 계신 것은, 제 각각 하시는 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가정에도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당신의 백성들에게 법을 주시고 법아래서 살도록 말씀하신다. 그러나 연약한 육체를 입은 인간은 하나님 법을 지키지 못하고 모두 죄 아래 갇히게 된다. 죄 아래 갇힌 인간이 이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죽게 되면 모두 지옥이다. 그걸 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하나님 법을 어긴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하시는 일이 각각 다르다.
이와 같은 원리로, 예수 믿는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은 하나님 영으로서 예수 믿는 이방인들에게 영적인 율법 역할을 하신다.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은 모두가 영적인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부패한 이방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성령을 따라 살 수 없다. 결국 기독교인들도 성령을 거역한 죄 아래 모두 갇히게 되었다. 이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죽게 되면 기독교인들 또한 모두 지옥이다. 그걸 아신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또 다시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 앞에 보내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 앞에 성령으로 오신 아버지와 영적으로 오신 아들이 하시는 일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 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마당으로 되어있다.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과 혼과 육신에 초점을 맞추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성소는 하나님(성령)이 계시는 곳으로서, 인간의 영(靈)을 주관 하신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끊어지자, 그동안 모든 인간이 마귀의 지배를 받아왔으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려준 피로 말미암아 인간의 ‘원죄’가 해결 되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다시 인간들과 영적인 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소는 그리스도(예수)가 계신 곳으로서 인간의 혼(魂)에 해당되는 곳이다. 인간의 혼(魂)은 인간의 ‘마음’속을 뜻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기독교인들 마음이 모두 부패하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마음으로 믿으라고 말을 하지만,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지 못하고, 그저 입술로만 하나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오셔야 한다.
오늘날 부패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죽은 영’이 존재하고 있다. ‘죽은 영’은 인간의 죄악을 먹고 사는 ‘영적인 존재’이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이런 영적인 존재를 부인하고 싶겠지만, 부인해도 어쩔 수 없다. 차라리 이런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마음속에서 영적인 존재를 몰아내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고 마지막에 모두 타락으로 가는 이유도 바로 이런 영적인 존재가 있다는 증거다. 예수께서 이방인들 앞에 영으로 다시 오시는 이유도 바로 이런 ‘영적인 존재’를 인간의 마음속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다.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게 되면, 그동안 믿는 자들 마음속에 주인으로 살던 죄악(죽은 영)을 몰아내고,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들어가시게 된다. 믿는 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들어가게 되면,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어떤 누구의 가르침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예배당에 나가서 예배드릴 필요도 없게 된다. 자기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는 과정이다. 바울이 고전13장에서 온전한 것에 대하여 설명했던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성전 마당은 인간의 육체를 뜻하는 곳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아주 중요한 도구로 쓰임 받는다. 인간이 죄를 짓고도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육체가 죄악을 담당해주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육체가 없기 때문에 한번 죄를 짓게 되면 다시는 용서 받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살아 있을 때 모든 죄를 용서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지은 죄도 죽으면 예수께서 모두 용서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거짓 영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육체가 없이는 자신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죽어서 용서받는 다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런 논리라면 하늘에서 범죄한 천사들도 모두 용서 받았어야 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보면, 각 교단마다 교리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은 그들 마음속에 ‘죽은 영’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법 아래서는 각자의 마음을 지배하는 영 또한 각기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입만 열면 성령으로 하나 되자고 말하지만, 이런 이유로 성령 아래서는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오늘날 교단이 자꾸 분열이 되고, 총회나 노회 때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가게 되면, 절대로 교단이 둘 셋으로 나뉘거나 또는 교회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과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여 하나로 통일시켜주기 때문에 인간 사이에 분열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리고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분명해졌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기독교인들이 계속에서 자신들 마음속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믿고 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은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자꾸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하지만, 기독교인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이 자꾸만 이런 억지 주장을 하기 때문에, 악한 영들이 그것을 교묘하게 속이고 거짓 목사들을 통해서 구원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자신이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12제자들이 예수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후 마지막에 성령에 붙들려서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면, 바울은 12제자들과 달리, 성령과 더불어 빛(영)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이방인들 앞에 복음을 전했다. 바울이 다른 사도들과 달리 그렇게 쓰임 받았던 이유는,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예표해주기 위해서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방인들 앞에 도적같이 오실 하나님 아들은, 결국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오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바울처럼 행동해 보려하지만 결코 바울 같은 삶을 살 수가 없었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가 자신의 마음속에 계셨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이 가능했지만, 에베소 교인들은 이제 겨우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아 영적인 율법아래 놓인 초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인데, 그들이 바울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서, 이렇게 하면 오히려 부작용만 더 발생하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현제의 기독교인들도 처음 불신자로 살 때, 어느 누군가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 이름을 부르게 되자,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후에 성령세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령을 받고 보니, 당시 황홀한 기분은 자신이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때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개, 돼지처럼 살던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되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되었고 또한 마귀와 귀신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신자로 살다가 성령을 받고 이런 체험을 하고나면, 자신도 이제 하나님의 자녀요 또한 확실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후로 이런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감히 어느 누가 나서서 기독교인의 구원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본인도 불같은 성령세례를 받은 후, 틀림없이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법아래서 이제 겨우 초보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단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영으로 들어오시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 속에 들어가셨던 예수께서,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 마음속에 영으로 들어오시게 된 것이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자랑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동안 성령의 법아래서 살았던 삶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성령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성령이 계셨기에 내가 죄를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음이 부패한 우리 이방인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성령의 법을 온전히 지킬 수도 없고 또한 따라 살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지키겠다고 온갖 편법을 써가며 발버둥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법을 지키겠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악한 영은 우리를 교만한 자리에 갖다 놓는다. 바울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모두 죄인 만들기 위해서 주셨는데, 인간이 그것을 지키겠다고 하니,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만 사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현제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 악한 영들은 믿는 자들을 자기 발아래 묶어놓고, 장차 오실 아들을 믿을 수 없게끔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자신이 구원(의인)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죄에서 구원해줄 예수를 배척하고 말았다. 이는 바리새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악한 영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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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바울이 전해준 복음은 이방인들의 입을 통하여, 지금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서 적어도 약20억 정도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이름을 부른다하여 모두가 하늘나라에 곧장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속에 성령이 아닌 그리스도가 계셔야 한다.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2:13)” 여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쫓아내라는 말은, 믿는 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자를 쫓아내라고 하는 말이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것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 마음속에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처음 받을 때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타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이런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겠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한번쯤 확인해본 사람이라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누구나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오셨기 때문에, 믿는 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아들)가 오시게 되면, 그동안 인간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던 죄악(죽은 영)이 떠나고, 대신 그 자리를 그리스도가 차지하여 아버지(성령)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성령 앞으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설명을 해줘도, 그리스도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독교인들로서는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성령이 곧 그리스도라고 주장을 한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설명할 때, 보통 이런 비유를 든다. 바람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갈대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바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많지만 바람처럼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설명을 한다. 그래도 불신자는 그런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때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자는 답답하여 죽을 지경이다. 그래도 믿는 자는 끝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그래도 불신자는 곧이듣지 않는다. 결국 성경에 “받은 자 외에는 알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떠올리며 되돌아서고 만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거듭 난자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육신의 소욕을 벗지 못한 자들이라 자신의 생각(죽은 영)이 자신을 온통 지배하고 있어서 도무지 하나님 아들이 전해주는 말을 곧이듣지 않는다. 이는 마치,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설명할 때, 불신자가 터무니없는 말로 알아듣는 것처럼 기독교인들 역시 똑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에게 하늘나라의 대해서 설명하지만, 그들이 예수 말을 비꼬며 듣지 않던 때와 너무도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 앞에 하나님 아들이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전해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들은 모두가 아들 앞으로 달려 나와서 자신의 죄를 통해 자복하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은혜를 입은 자들은 다시 전 세계방방곡곡을 누비며 천국복음을 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나오는 자들을 모두 알곡으로 인치는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 알곡들은 하나님 곡간에 들어갈 것이나, 아들이 전해주는 말씀을 믿지 않아 끝까지 자기 죄악을 벗지 못한 자들은 쭉정이로 땅에서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