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예표로 오시는 그리스도!
본문: 로마서9:1-13
제목: 야곱의 예표로 오시는 그리스도!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 이삭이,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그러나 이삭의 둘째 아들, 야곱이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그 이유는, 이삭에 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에 자세히 소개된 반면, 야곱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야곱을 신약성경에 자세히 소개하지 않은 이유는,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사실 유대인들이 읽고 보아야 할 책이다. 구약(율법)에 기록된 성경말씀을 따라 살지 못한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신약성경을 보게 되면, 거기에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음이 교만한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된 나머지, 예수를 배척하며 신약성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유대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이스라엘 2천년 역사가 끝나자, 이방인에게도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부 사도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자,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게 되었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내리자 사도들이 깜짝 놀랐다. 사도들이 놀란 이유는, 이방인들은 하나님 법도 없이 개, 돼지같이 살던 사람들인데, 그들에게도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받은 성령과 유대인들이 받은 성령은 구원과정에 있어서 전혀 다르다. 이런 사실은 당시 사도들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들과 똑같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게 되자, 모두 구원에 이르는 줄 알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전혀 모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직 기독교들 앞에는 하나님 아들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 아들이 오셔서 알려 주어야 알 수 있는데, 하나님 아들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 중에는 아직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한명도 없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하여, 자신들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성령은 그리스도 영이 아니고 아버지 영이다(마10:20참조). 따라서 성령은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 역할만 한다. ‘영적인 율법이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주신 하나님 법으로서 기독교인들이 믿고 따르며 지켜야할 법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마음이 모두 죄악으로 부패하여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모두가 성령의 법을 어긴 죄인이 되어 있다. 성령의 법아래 갇힌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 앞에도 하나님 아들이 오셔야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구원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 모두가 율법 아래 갇힌 죄인이 되고 말았다. 율법아래서 죄인으로 살아가던 그들 앞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믿게 되자, 이사야(53:4-5)가 말씀한대로 예수 몸으로 율법을 거역한 유대인들의 죄(자범죄)를 해결해 주셨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를 통해서 ‘원죄’를 해결 받았다는 증거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것으로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는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물(몸)과 성령(피)’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달리 하나님 법도 없이 개, 돼지처럼 살던 사람들이다. 그러다가 전도를 받고 예수 이름을 부르자,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방인들이 받은 성령은,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받은 성령과 달리, 이제야 비로소 이방인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율법’을 받고, 사단의 발아래서 살다가 하나님 백성으로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첫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무조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만 받으면, 유대인들처럼 구원이 되는 줄 착각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려면,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신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한 죄(자범죄)를 사함 받고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온전한 구원(救援)이란? 기독교인의 영(靈)과 혼(魂)이 모든 죄(원죄와 자범죄)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다. 구원 받은 인간의 영(靈)은 성령의 지배하에 있고, 인간의 혼(魂)마음은,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영과 혼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
이방인들도 예수 이름을 부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원죄’를 해결 받는다. 그 증거로 ‘성령’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현제 기독교인들은 영(靈)만 해결 받은 상태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직도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마음속의 죄)가 남아 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마음속의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죽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실을 미리 아시고 이방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 앞에도 보내주시는 것이다.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의 정통성은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로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후,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그리스도 영이 되셨다. 예수께서 그리스도 영이 되어 맨 처음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 마음속에 들어가셨다. 바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자, 그가 180도로 달라져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바울이 기록한 말씀을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보는 것은, 바울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하나님 아들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신고 있는 자이다.
이스라엘 땅에 이미 12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던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려는 뜻도 있지만, 그 보다는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하나님 아들을 예표해 주시기 위해서다.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실 하나님 아들 또한 이방인 중에서 한 사람을 미리 선택하여 바울처럼 예수께서 영으로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분이 바로 이방인들 앞에 야곱의 예표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한 영으로 보고, 성령 받은 것을 두고 모두가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착각하고 있다. 허나 이는 대단히 잘못된 판단이다. 예수께서도 분명히 성령을 아버지 영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20)” 이렇게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부르는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지켜온 권위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지금 와서 성령을 그리스도 영이라고 하게 되면, 성도들에게 지금까지 거짓말한 것이 되는데,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는가?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래서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예수 앞에서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분리하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현재 성령만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이 된다. 따라서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려면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데, 성령만 받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한 영이라 우기며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이방인들 앞에 야곱의 예표로 하나님 아들이 오셨을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오신 분을 하나님 아들로 믿을지 대단히 의문이다. 예수가 유대인들 앞에 오셨을 때, 자신을 의롭다고 하던 자들은 예수를 이단괴수라 하여 믿지 않았다. 하지만, 율법의 저주로 자신의 몸이 병들었던 자들과 당시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와 창기들은 예수를 찾아와 믿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이단괴수라 하여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령을 거역하여 마음이 병든 자들과 세상으로부터 온갖 비난과 손가락질 당하며 살았던 자들이, 그나마 영적인 아들을 찾아와서 믿게 될 것이다.
신약성경은 사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약성경을 보며 구원에 이르려 하고 있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기독교인들이 신약성경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려면 적어도 신약말씀 전체를 그대로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이 무슨 방법으로 신약성경을 그대로 따라 살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 아무리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성령이 충만한 자라도 신약성경을 따라 살 수 없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께서 마음으로 미워만 해도 살인이요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마음속으로 남을 평생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있으며, 남자들은 여자를 보고 평생 음욕을 품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신약성경에는 이런 말씀 말고도 생활에 대한 규범들이 가득하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율법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무슨 수로 신약성경 말씀대로 살 수 있겠는가? 성경말씀대로 살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법아래 갇힌 죄인들이다.
유대인들이 구약(율법)말씀대로 살 수 없었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 또한 신약성경 말씀대로 살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신약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한계(죄)를 깨닫고 겸손하게 낮은 자세로 살면서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아들을 기다려야 한다. 영적으로 오신 아들만이 죄 아래 갇힌 기독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약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한계(죄)를 깨닫고,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가를 깨달았다면, 지금 영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이방인들을 위하여 기록하고 있는 말씀을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구약(율법)을 통해서 자신을 죄를 깨닫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신약성경을 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배척한 체 계속해서 신약성경(영적인 율법)만 들여다보게 되면, 결국은 법을 지켜서 구원에 들어가겠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체 구약성경(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은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믿는 백성들에게 법을 주신 이유는, 그들을 모두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이삭의 예표로 육체를 입은 아들을 보내주셨고,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앞에는 야곱의 예표로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보내주시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