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거친반석 2014. 3. 30. 12:57

본문: 히브리서8:1-13

제목: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건설회사가 아파트를 짓기 전에 모델하우스를 먼저 지어서 선을 보이는 것은, 우리 회사가 앞으로 이런 아파트를 지어서 분양할 테니까 와서 보시오 하는 무언의 광고다. 사람들은 모델하우스를 보고 건설회사와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이 이루어지고 나면 건설회사는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파트가 다 지어지고 나면 모델하우스는 더 이상 쓸모가 없기 때문에 허물어 버린다. 아파트를 짓기 전까지는 모델하우스가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아파트가 지어지고 나면 더 이상 쓸모가 없기 때문에 허무는 것이다.

하늘나라도 이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하나님께서 첫 것으로 주신 것은 모형이요 둘째 것이 실체이다. 이런 원리에 따라 유대인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 모형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리하여 예수가 실체로 오셨지만, 그들은 성전만 붙들고 있을 뿐,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오늘날 자신들에게 주신 예배당이 영적으로 오실 그리스도 모형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구원 받았다는 생각에 공중에 재림할 예수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께서 “도적같이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기 전에,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을 통해서 영으로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이다.

예께서가 “도적같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하늘에 오르셨던 예수가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그리스도 영’이 되어 맨 처음 다메섹 도상에서 빛(영)으로 바울 마음속에 들어가셨던 것처럼, 이방인들 앞에도 사람을 통하여 영으로 다시 오시겠다는 것이다. 그때 사람을 통해서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신 아들(예수)을 믿는 자들은 모두 구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할 때는 이 세상 마지막으로, 그때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 수 있도록 천사들이 나팔을 불며 오신다. 그러나 ‘성령(영적인 율법)’아래 갇혀 있는 기독교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땅에 오실 때는 사람을 통해서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누가 ‘예수의 영’을 받은 하나님 아들인지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가짜 예수 영을 받은 이단들과 적그리스도들까지 설쳐 되고 있어서, 진짜 ‘예수 영’을 받고 오는 하나님 아들을 찾아서 믿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다시 오신 예수께서는 기독교인들 중에서 ‘영적인 아들(예수)’을 믿고 나오는 자들을 알곡으로 인치는 작업을 하신다. 그때 영적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쭉정이로 땅에서 버려지게 될 것이다.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알곡으로 인치는 작업이 모두 끝나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여 땅에서 알곡들로 인친 자들을 공중으로 불러 올려가게 된다. 그런 후에 땅에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잔인한 심판이 진행될 것이다.

예수께서 영으로 믿는 자의 마음속에 들어가시게 되면, 더 이상 기독교인들은 예배당에 나가서 예배드릴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영으로 오신 예수께서 모든 것을 직접 자신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오늘날 예배당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이런 원리로 오늘날 예배당도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들은 계속해서 예배당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예배드리는 이유는,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미 영으로 도적같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공중에 재림할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두고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쳤던 구원 과정들을 이방 기독교인들도 모두 똑같이 거치도록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런 과정들을 모두 생략하고 곧바로 구원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기독교인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조금만 알았더라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바리새인들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아무리 알려주고 설명을 해주어도, 끝까지 자신의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돌아설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이 첫 것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예수로 말미암아 주신 복음이 둘째 것에 해당된다. 따라서 “첫 것은 낡아지고 쇠하여지는 것이요 둘째 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리고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리라!” 성경은 계속해서 이렇게 첫 것과 둘째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첫 것은 낡아지고 쇠하여 지는 반면, 둘째 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들을 모두 죄 아래 가둔 다음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복음)을 보내서 율법아래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서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제 기독교인들에게 더 이상 그런 이야기로는 큰 감동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영적인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영적인 율법’‘영적인 복음’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자꾸만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까 기독교인들이 식상해 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말씀에 식상한 기독교인들이 좀 더 새로운 말씀을 찾아 이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 다녀보지만, 어느 교회를 가더라도 모두 똑같은 말씀을 하기 때문에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좀 더 새로운 말씀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급기야는 가짜 그리스도(이단)에게 속아서 인생을 망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는 ‘영적인 율법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주신 하나님의 법이다.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을 살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다는 자는 사람을 통해서 영적으로 오신 하나님 아들(예수)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성령(영적인 율법)’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고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영적인 복음’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씀을 처음 듣게 될 것이다. 이는 이제야 이방인의 때가 되어, 하늘에 오르셨던 예수께서 영으로 사람을 통해서 오셔서 들려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복음’을 주셨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영적인 율법’‘영적인 복음’을 주셨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 앞에 주신 ‘율법’‘복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되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 앞에 주신 ‘영적인 율법’‘영적인 복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영적인 백성이, 자꾸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복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온전히 따라 살지 못하여 모두가 율법아래 갇힌 죄인이 되었던 것을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마음이 부패하여 영적인 율법을 따라 살지 못하여, 모두가 영적인 율법아래 갇힌 기독교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영으로 사람을 통해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예수 영’은 성령이 아니고 ‘그리스도 영’ 혹은 ‘아들의 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자꾸만 삼위일체 논리를 내세워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한 영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아직까지 ‘그리스도 영’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스라엘 2천년 역사가 첫 것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오늘날 기독교 2천년 역사도 첫 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율법아래 갇힌 유대인들을 죄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마지막에 오신 예수가 둘째 것에 해당된다면, 오늘날 영적인 율법아래 갇힌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마지막에 영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둘째 것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첫째 것과 둘째 것을 주셨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첫째 것과 둘째 것을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아래서 2천년 동안이나 살게 하신다음, 아들을 믿어야 구원이라고 하시고, 율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예수만 믿으면 구원이라고 하면, 어떻게 공평한 하나님이 될 수 있냐는 것이다. 율법아래 살던 사람들은 율법이 걸림돌이 되어 예수 믿기가 쉽지 않은 반면, 율법도 없이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인들은 자신들 앞에 걸림돌이 없으니까 예수 믿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다.

만약 유대인도 자신들 앞에 율법이 없었다면 이방인들처럼 예수 믿기가 굉장히 쉬웠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도 이방인들처럼 예수 이름만 불러서 얻는 구원이라면, 예수를 그토록 배척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율법 없이 살다가 예수 이름만 불러서 얻는 구원이라면, 유대인들은 굉장히 억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기독교인 모두에게 똑같이 각각의 율법과 복음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공평한 방법에 따라,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아담이 지은 ‘원죄’만 사함 받게 하셨다. 그리고 그 증거로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나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는 ‘영적인 율법’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나,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고 모두가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 되어 있다. 그런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에 오르셨던 예수께서 영으로 사람을 통해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영으로 사람을 통해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도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기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이 예수 믿는데 걸림돌로 작용했던 것처럼, 결국 기독교인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신 ‘영적인 율법’이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되어, 영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공평한 구원의 방법이다.

오늘날 예배당이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서 지금까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첫 것(예배당)은 언제나 낡아지고 쇠하여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둘째 것(그리스도)을 붙잡아야 한다. 예수께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언제나 첫 것에만 매달려 있을 뿐 좀처럼 둘째 것을 붙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새 아파트를 지어놓으니까 계속해서 모델하우스가 좋다며 거기서 살겠다고 우기는 사람과 똑같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