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믿음은 순종에서부터 시작된다.

거친반석 2016. 8. 7. 13:35

주일 낮 말씀

본문: 사무엘상15:17-23

제목: 믿음은 순종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나올 때, 아말렉 사람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것을 기억하고, 사울 왕에게 명령하기를 지금 당장 가서 아말렉 사람들의 모든 소유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진멸하되 남자와 여자는 물론이요 심지어 젖 먹는 어린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까지도 모두 죽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나 사울왕은 아말렉 왕을 사로잡았으나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짐승들도 가장 좋은 것들은 남기고 보잘 것 없는 것들만 죽였다. 사울 왕은 하나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서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명령을 저버린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사울의 행동에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아말렉 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던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도리어 사울왕의 인간성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울이 살찐 짐승들을 죽이지 않았던 것은 그것들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고 했던 것이다. 사울왕의 행동을 세상적인 눈으로만 보게 되면 도리어 사울 왕은 품성이 착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말렉 사람들을 죽이라고 했던 것은, 아말렉이 취한 행동들이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였지만, 사울 왕은 자기 생각을 앞세워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사무엘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를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이스라엘 백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믿어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당시 그들의 믿음을 의심할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모두가 입으로는 여호와 이름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을 가늠해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느냐로 그들의 믿음을 시험해볼 수밖에 없었다. 사울 왕처럼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했던 자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윗처럼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던 자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다윗은 사울왕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죄를 저질렀던 자이다. 그가 남의 아내를 취하기 위하여 그의 남편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사울이 저지른 죄와 다윗이 저지른 죄의 가치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 또한 인간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늘나라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하니까 그들의 믿음을 진짜 시험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보내주셨다. 하나님을 믿었던 자들이라면 당연히 예수도 믿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고 나오는 자들이 없었다. 도리어 예수가 자신들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하여 이단괴수 취급을 하였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런 일이 벌어지질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입으로만 믿어도 되지만,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절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따라 살지 못한 자들을 모두 율법아래 죄인으로 가두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다보니, 예수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그들의 믿음의 깊이를 가늠할 길이 없다. 모두들 입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자신이 얼마나 성령을 잘 따라 살았느냐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줘야 한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를 통해서 아담이 지은 원죄를 사함 받았다는 증거로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비로소 이방인들도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하나님 백성이 법대로 살지 못하였을 경우 죽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죽기 전에 반드시 자신이 성령을 어긴 죄를 해결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죽어라고 신앙생활 하고도 마음속의 죄를 해결 받지 못한 것 때문에 마지막에는 지옥 불에 던져지고 말게 된다.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주신 법이 바로 성령의 법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영적인 율법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는 육체에 율법을 주셨지만,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받은 영적인 백성들이라 마음속에다 영적인 율법을 주셨다. 이런 원리에 따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거역하면 육체가 병들게 되지만,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게 되면 마음속이 병들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갈수록 타락하여 목사나 성도 할 것이 없이 모두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바로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한 죄 때문에 마음속이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죄()가 마지막 때가 이르자 모두 밖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모두가 겉으로 멀쩡하다보니 자기 마음속이 병든 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입술로 예수 이름만 부르고 있으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요 열심히 교회만 다니고 있으면 이 또한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칭찬받고 있다. 하지만 믿음 좋은 사람이란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접고 온전히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성령을 구원 받았다며 모두가 천국에 무난히 들어갈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입술로는 모두가 예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그들의 믿음이 좋은지 나뿐 지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부활하신 예수를 이방인들 앞에 다시 보내주시는 것이다. 그들이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제대로 잘 믿었다면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도 잘 믿을 것이요 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거짓으로 믿었다면,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 역시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잘 믿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율법을 마음속에다 주시고, 성령의 법을 따라 살도록 하였다. 하지만,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지 못하고, 기독교 2천년 역사 마지막에 가서는 모두가 성령의 법을 어긴 죄인이 되고 말았다. 이런 원리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역시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알아야 부활하신 예수를 잘 믿을 수가 있다. 그런데 모두가 자신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란 사실을 전혀 모르다보니,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믿음에는 반드시 자신의 책임 있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말로는 믿는다 말해놓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믿음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4-17)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야고보가 기록한 이 말을 가지고 자신들도 믿음으로 행함을 보인다며,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빵을 나눠주기도 하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하여 봉사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보였다며 대견해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걸 두고 믿음이라 말하지 않는다.

 

야고보가 말한 믿음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따라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고 빵을 나눠주는 일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이런 것을 두고 성경은 믿음이라 말하지 않는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믿음이라 말한다면 이것이 무슨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겠는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육신의 소욕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고 봉사를 하는 것은 전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두고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예수처럼 믿음에는 절대 자신의 목적이나 유익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적어도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성령의 뜻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성령의 뜻대로 사는 자가 없다. 모두가 입술로만 예수 이름을 부르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성령의 뜻대로 사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아주 예수를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 앞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기독교인들의 진짜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로 한 것이다. 이 때 자신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이나,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고 느끼는 자들은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다. 이것으로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시기 전에 땅에서 벌써 알곡과 쭉정이로 갈리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예수께서 영으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주인으로 들어가시게 되는데, 그때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성령의 뜻대로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들의 영이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가실 때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의 삶이요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자들이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사울 왕처럼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끝까지 자기 고집과 생각을 따라 사는 자들은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다윗이 자기 정욕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죽였지만, 그가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런 자들을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들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거역하는 것과 차라리 세상에서 살인을 했을지언정 철저하게 회개하고 돌이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 중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더 불쌍히 여겨주시겠는가? -귀 있는 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