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
주일 낮 말씀
본문: 마태복음16:21-28
제목: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결국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죽음을 각오를 하고 예수를 쫓으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쫓는 일이 쉬운 일 같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기라성 같은 가말리엘 출신의 신학자들이 즐비하였지만, 그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없었다. 바리새파 출신 중에서 유일하게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으나, 그도 자기 의지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기 위해서 빛(영)으로 찾아갔기 때문에 사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는 열두 제자들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쫓는 자가 몇 명이나 될까? 한 마디로 말해서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 왜 한명도 없다고 단언하는가? 아직 기독교인들 앞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적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려면 반드시 사도 바울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기독교인들 앞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적이 없기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받으면 곧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로서 그리스도 영이 아니고 아버지의 영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받은 성령으로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 기성 교회에서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가르치는 것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내용만 보고 유대인들의 구원과정을 그대로 가져다 기독교인들에게 적용시키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구원관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의 구원과정과 이방인들의 구원과정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무조건 신약성경에 기록된 내용만 보고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의 구원과정을 그대로 가져다 자신들에게 곧바로 적용시키다보니,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만 받으면 곧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려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 같은 자를 통해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시는데, 기독교인들은 그를 믿어야 비로소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성령 받은 것만으로는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어도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하게 되면,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처럼 영으로 자기 마음속에 좌정하고 계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하게 되면, 아직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죄를 짓게 하는 “죽은 영(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증거다. 죄악이 아직도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무조건 성령만 받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면 이는 배나 지옥자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 값을 통하여 값없이 성령(영적인 율법)을 받았지만, 현재는 성령도 제대로 따라 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바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죽은 영(죄악)”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게 자꾸만 방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도 제대로 따라 살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자기 목숨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쫓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인간이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버리려면 예수처럼 자신이 다시 살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아버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들을 끝까지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강청하였던 것이다. 이는 바로 자신이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우리도 예수처럼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자신의 목숨을 이웃을 위해 버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계셔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계셔야 우리가 목숨을 버려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면 자신을 살려줄 분이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겠는가? 물론 이슬람교도들처럼 신념으로 자기 목숨을 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신념은 믿음이 아니고, 자기 확신에 찬 믿음이다. 이슬람 인들이 죽으면 막연하게 알라가 데려갈 것이라고 자기 생각을 믿듯이,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자신은 예수를 믿었으니까 천국에 데려갈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이런 자들은 자기 신념을 믿음으로 둔갑하여 믿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특별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혹시 기독교인들 중에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성령께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들을 해주실 거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 있거든, 이번 기회에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야 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 영으로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우리 이방인들에게 “영적인 율법”을 주러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기독교인들이 땅에서 하나님 말씀(법)대로 살았나? 못 살았나를 마지막 날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심판대에 서는 것을 원치 않고 계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당신의 아들을 또다시 이방인들 앞에 보내서 성령을 어긴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현재 성령의 법(영적인 율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살아온 우리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 한분뿐이다. 이스라엘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는 오직 율법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만 사해주신다. 이런 원리에 따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죄 가운데 놓여 있는 우리 이방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성령은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 역할을 하시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성령 받은 것으로는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하신 말씀을 해석하면 이렇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 가운데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靈魂)은 모두 죽어서 태어난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죄를 짓게 하는 “죽은 영(죄악)”이 들어 있다. 오늘날 인간들이 갈수록 험악한 죄를 짓는 것은 “죽은 영”들도 인간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악들도 함께 발전한다. 문화와 문명이 발달하면 인간들의 삶은 윤택해질지 모르지만, 덩달아 인간의 죄악도 함께 발전하기 때문에 그저 좋은 일만은 아니다. 60~7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이토록 험악한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88올림픽을 거치면서 외국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급속도록 흉악한 범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이런 범죄는 지능적으로 더 발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보다도 훨씬 더 흉악한 범죄가 점점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 어떤 방법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 이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거듭나는 길 뿐이다. 그래야 내가 이런 죄악에 물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예수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목숨을 버리라”고 하는 말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죄를 짓게 하는 “죽은 영”을 버리라고 하는 말이다. 만약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곧 “죽은 영”과 함께 계속해서 살겠다는 말이 다. 그래서 예수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죽은 영”이 인간의 목숨을 손에 쥐고 겁박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인간들이 모두 여기에 속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죽은 영”이 인간의 목숨을 버리지 못하도록 겁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지로 인간이 목숨을 버리게 되면, 죽은 영은 그곳을 떠나야 한다. “죽은 영”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떠나게 되면, 그는 구천을 떠도는 혼령이 되고 만다. 그래서 “죽은 영”도 인간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인간들을 겁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죽은 영”들의 방해가 이토록 심한데, 어떻게 해야 인간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릴 수 있을까? 인간이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과 자기 죄악을 낱낱이 까발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자신의 죄악을 벗지 못하고 죽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자기 목숨을 끊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낱낱이 까발리는 것이다. 죄를 짓게 하는 “죽은 영”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죄를 낱낱이 까발리게 되면, “죽은 영”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의 마음속에서 버티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의 죄를 실토 하는 것은 곧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과 자기 죄악을 실토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쉬운지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10만 명쯤 모이는 대형교회 목사가 여자 성도를 성폭행한 일이 있었다. 그 목사는 그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런데 우연찮게 그 교회성도 한분이 담임목사의 성추행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목사는 그 성도를 불러다 많은 돈을 손에 쥐어주고 입막음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가지 못해서 담임 목사의 성추행 사실이 온 교회에 퍼지게 되었다. 목사는 극구부인하면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지만, 소문은 날개를 달고 다른 교회로까지 퍼지게 되었고, 결국 노회와 총회까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신문과 방송에까지 나오고 말았다. 하나님도 이런 사실을 모두 다 알고 계시는 것이다. 이럴 때 이 목사는 어떤 처신을 해야 할까? 두 가지 방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다가 그대로 죽는 것이다. 이런 삶은 지옥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치부를 교인들과 세상 앞에서 완전히 까발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목사는 교인들과 세상으로부터는 완전히 암매장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실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게 되면, “죽은 영”이 떠나게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결국 그 목사는 세상으로부터는 왕따를 당하고 손가락질을 당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선택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목적이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길을 택하겠는가? 말로는 자신의 죄를 실토하고 모두가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 나갈 것이라고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렇게 잘 나가던 목사가 교인들과 세상으로부터 하루아침에 성폭행 범으로 비난 받으며 왕따를 당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악을 까발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죄악을 날마다 먹고 마시며 살면서도 그것을 까발리기 보다는 적당히 얼버무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이 짓는 죄에 비하여 죄악을 마음속에다 담아 두고 살다보니 결국 그 죄가 밖으로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날마다 먹고 마시는 죄악을 끝까지 숨기며 전전 긍긍하고 살다가 끝내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것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록 왕따를 당하고, 손가락질을 당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 새 삶을 살 것인지 결단을 해야 한다. -귀 있는 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