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하여 기록한 글이니라!
주일 낮 말씀
본문: 누기복음4:14-30
제목: 나에 대하여 기록한 글이니라!
구약에 기록해 놓은 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고 살아야 율법에 관한 규례를 적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장차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왜 이 두 가지 말씀(율법과 복음)을 동시에 기록해 놓았는가? 그 이유는 죄 가운데 태어난 인간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고 천국에 들어가라는 뜻에서다. 그러나 당시 기라성 같은 율법학자들이 즐비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구약에 기록된 율법과 복음의 조화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다. 그들이 율법과 복음의 조화에 대하여 알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신학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흙에서 나온 인간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품속에서 나오신 하나님 아들 한분뿐이다. 따라서 당시 선생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을 가르치다보니, 그들의 가르침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모두가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줄 알고 그들의 말을 철석 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으로 의롭게 된 줄 알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예수가 오셨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안했다. 그 이유는 예수가 메시아라면 당장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할 텐데, 그런 행동을 하지 않고 도리어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다니는 것을 보자, 예수는 자신들이 바라는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 종교의 괴수쯤으로 보았던 것이다. 구약에 기록된 율법과 복음의 조화를 알지 못하고 성경을 가르쳤던 폐단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나 지옥자식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예수가 오셨을 때 특히 바리새인들과 부딪히는 일이 잦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바리새파 출신들이 대부분 지도자들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잦은 마찰이 일어났다.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가 선생 노릇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가는 지를 알 수 있는 분분이다. 야고보는 이런 경우를 두고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함부로 선생이 되지 말라!”고 경고 하고 있다.
이런 일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굉장히 많다. 일반 성도들 중에도 이제는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자들이 많아서 목사들 못치 않다. 하지만, 아무리 성경에 해박한 지식이 있더라도 아직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들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성경을 함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 앞서도 말했듯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품속에서 나오신 그리스도 한분뿐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려면 사도 바울처럼 부활하여 빛(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시하여 성령을 받으면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는 신학교만 나오면 곧 목사가 되어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모두가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로서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을 주러 오셨을 뿐, 기독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은 기독교인의 죄를 사해주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의 죄를 사해주실 분은 오직 부활하여 빛(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한분뿐이다.
만약 성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도 주시고, 죄도 사해주실 것 같으면 굳이 이스라엘 땅에도 예수가 오실 필요가 없다. 구약에서도 성령이 활동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때 성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도 주시고, 죄도 사해주시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또 다시 예수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하시지 않는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따라 살지 못한 하나님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는 일은 오직 아들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시는 일이 각각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던 것은, 기독교인들이 마음속으로 따라 살아야 할 “영적인 율법”을 비로소 성령을 통해서 받은 것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육체에 율법을 받은 것과 같은 원리다. 성령을 통하여 “영적인 율법”을 받았다면,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로서 어느 누구도 성령을 따라 살 수가 없다. 그리하여 끝에 가서는 모두가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들을 성령을 거역한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시는 것이다. 이런 절차를 무시하고 무조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기독교인들도 배나 지옥자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으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예수가 공중에 재림하면 들림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죄가 남아 있는 자들은 절대 들림 받을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죄가 가득하다. 성령을 거역한 죄뿐 아니라,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수두룩하다. 자신의 죄도 사함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시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쭉정이로 땅에서 버림받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 공중에 재림하시는 예수는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온 세상이 다 알 수 있도록 오신다. 하지만, 그 전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람을 통하여 도적같이 오셔서 땅에서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서 알곡으로 인치는 작업을 먼저 하시는 것이다. 그래야 마지막 날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셔서 땅에서 알곡들을 공중으로 불러 올려가게 될 것 아닌가? 이를 두고 예수께서도 “깨어 있어라! 내가 도적같이 가리라” 말씀하시고 있다.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기에 앞서서 기독교인들 앞에 도적같이 오시는 이유는, 가장 천하고 낮은 자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역시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당시 가장 천하고 낮은 자들을 구원해 주셨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시는 이유는, 교만한 자들의 눈을 가려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큰 교회 유명한 목사가 말씀 전하는 곳에 예수가 계실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예수는 절대 그런 곳에 계시지 않는다. 예수께서 작은 소자(小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오늘날에도 자신을 가장 죄인으로 낮추는 자의 마음속에 부활하신 예수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구나 의무적으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영적인 백성이라 부른다. 영적인 백성이기 때문에 “영적인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목사들이 이제 겨우 “영적인 율법”을 받은 것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구원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는 마치, 율법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구원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잘못된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 그 밑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지옥자식이 되고 만다. 오늘날 신학자나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잘못된 구원관을 가르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성경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까 위해서 말했듯이 흙에서 나온 인간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리 잘 가르쳐보려고 하지만, 아직 죄악을 벗지 못한 인간으로서는 잘못된 구원관을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오직 하나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내 마음속에 오셔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선생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고 살아가야 할 율법을 기록한 책이라면, 신약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지키고 살아가야 할 율법을 기록한 말씀이다. 구약에서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고 했을 때, 구약에서는 직접 사람을 죽여야 살인죄가 성립된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는 마음속으로 미워만 해도 살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기독교인들 중에 어느 누가 속으로 남을 한번이라도 미워하지 않고 살 사람이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속으로 미워만 해도 살인이요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디 인간의 죄악이 이것뿐인가? 시기, 질투, 분노, 거짓, 탐욕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이것들을 모두 지켜야 한다. 그런데 무슨 수로 기독교인들이 이것들을 다 지키며 산다는 말인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논리상으로 보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 현실과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지키지도 못할 말씀을 하신 것일까? 이는 예수께서 지키지도 못할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을 죄 아래 가두어 놓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래야 기독교 역시 2천년 마지막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셨을 때, 기독교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 아닌가?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는 사람 속에 들어오실 수 없지만, 부활하신 예수는 이제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실 수가 있다.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게 되면, 내 안에 있던 죄악들이 모두 물러가고 예수가 주인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나도 예수님처럼 살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을 의로운 자로 여겼으나, 예수를 만나고 난 후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듯이, 우리 역시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게 되면, 내가 비로소 어떤 죄인인가를 알게 되고, 더 나아가 내안에서 죄를 짓게 하던 악이 사라졌기 때문에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성령의 법을 따라 살 수 없지만, 예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되면, 예수께서 성령의 법을 따라 살게 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법을 주시고 그 법아래서 살게 하셨던 것은, 결국 하나님 백성들을 모두 죄 아래 가둔 다음 당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법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려면,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모두 지켜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지킬 자가 없다. 이를 지키고 이루어 주실 분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도 한분뿐이다. 따라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야 비로소 하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온전치 못한 자들이 유대 율법학자들처럼 선생이 되어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기독교인들이 모두 구원 받을 줄 알고 착각에 빠져 교만한 자리에 앉아, 가장 천하고 낮은 자를 통해 도적같이 오신 예수를 문전박대할까봐 두렵다. -귀 있는 자는 부활하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