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감 받은 자의 삶!
주일 낮 말씀
본문: 마태복음18:21-35
제목: 탕감 받은 자의 삶!
우리 속담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의 뜻은, 윗사람이 아래 사람을 사랑하기는 쉬어도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말이다. 이 속담처럼 부모로부터 사랑을 먹고 자란 자식은 그가 성장하여 부모가 되었을 때 그 또한 자기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게 된다. 이렇게 위로부터 사랑을 받아먹고 자란 사람은, 그 역시 자기가 받은 사랑을 남에게 나눠주게 된다. 마찬가지로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죄악을 탕감 받은 자는 남의 죄도 탕감하여주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탕감 받지 못한 자는 남의 죄도 탕감하여 주지 못하게 된다. 그 이유는 위로부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자는, 남의 죄 또한 탕감하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내용을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데,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다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마18:24-34).
오늘 본문이 좀 역설적이긴 하지만,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덧붙여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탕감 받아보지 못한 자는 결코 남의 죄 또한 탕감하여주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이유는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죄악을 탕감 받아본 적이 없는 자가, 어떻게 남의 죄악을 탕감하여 줄 수 있겠는가?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탕감 받아본 자만이 결국 남의 죄도 탕감하여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모두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잡아다 옥에 가두는 우매한 일은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위 내용은 우리들을 깨닫게 하실 목적으로 기록한 말씀이지만, 실지로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은 자는 절대 이런 우매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많은 죄를 탕감 받은 자는 그만큼 남의 죄도 많이 탕감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적게 탕감 받은 자는 남의 죄도 적게 탕감하여 주게 된다. 이때 ‘죄는 다 똑같은 것이지 무슨 죄에 많고 적음이 있냐고’ 반문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죄의 많고 적음이란? 내 죄악의 깊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악을 많이 알면 알수록 주님으로부터 탕감 받은 것이 많게 된다. 그런 자는 다른 사람의 죄악 또한 많이 탕감하여 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 말씀을 들어보자!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오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예수께서 그것을 아시고 바리새인에게 묻기를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둘 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기를 “많이 탕감을 받은 자니이다”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36-47).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직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죄악을 탕감 받아 본적도 없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영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를 육신적으로 이해하면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남의 죄를 탕감해주려면 자신이 먼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죄악을 먼저 탕감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남의 죄를 탕감해줄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기독교인들 앞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공식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들 중에는 아직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은 자가 없다. 이런 말을 하면 기독교인들로서는 자신의 구원을 부정하는 것이라 하여 흥분하겠지만, 흥분하지 말고 끝까지 말씀을 들어보시라! 만약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죄악을 탕감 받은 사람들이라면,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남편은 자기 아내의 죄악을 탕감하여 주어야 할 것이며, 아내는 남편의 죄악을 탕감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탕감은커녕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기 바쁘지 않던가? 교회 안에서도 주님으로부터 죄악을 탕감 받은 자들이 하는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행동들을 보이고 있지 않던가? 이는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죄악을 탕감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다는 증거다. 그래서 모두들 잘난 사람들은 잘 난 사람들끼리 당을 짓고, 못난 사람들은 못난 사람들끼리 당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며 교회 안에서도 바람 그칠 날이 없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남의 죄를 탕감하여 주어야 한다고 말하니까 혹자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가지고 남의 죄를 탕감해주는 것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옛날에 갓 시집온 여자들은 시어머니에게 모진 시집살이 생활을 견디어야 했다. 시어미에게 모진 시집살이를 당하며 살았기 때문에 자신만은 며느리를 얻으면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해보지만, 막상 며느리를 얻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는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야고보의 말처럼, 우리 마음 가운데서 욕심(죄)을 떨쳐버려야 하는데, 그게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옛 말에 이웃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있듯이,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괜히 자신이 울화통이 치미는 것이다. 남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것인데 왜 내가 울화통이 치미는 것일까? 그것 역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시기) 때문이다. 이 몹쓸 병은 이 세상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되지 않는다. 인간이 죽어지면 모를까 살아 있는 한 인간에게서 이 병은 결코 떠나지 않는다. 이것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인간의 주인이 되어 주셔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절대로 이 병은 치료되지 않는다. 시집살이를 시킨 시어미에게도 그리고 이웃사촌이 논을 사면 괜히 배가 아프던 사람에게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야 비로소 이런 병이 치료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남이 짓는 죄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그러다보니 남은 쉽게 정죄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죄악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다. 성경에는 이런 경우를 두고 “남의 눈의 티끌을 보면서 정작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 우리는 자신의 죄악을 먼저 보지 못하고, 남의 죄악을 족집게처럼 먼저 보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빛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계시게 되면, 그리스도의 빛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을 먼저 보게 되는데, 그것이 없다보니 남의 죄악을 먼저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죄악을 먼저 탕감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먼저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죄악을 탕감 받게 되면, 남을 정죄하기에 앞서서 자신을 먼저 보게 되니, 남의 죄를 무조건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드리는 말씀이기 때문에 곧 살리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빼내지 않고 교회에서 선생노릇을 하고 있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그런 자들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하여도 모두가 인간의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모두가 인간의 영혼을 죽이기 위한 말들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들조차도 자신이 하고 있는 말들이 인간의 영혼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안다면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시는 말씀이 아닌 것들은 교인들을 배나 지옥자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죄악을 탕감 받은 자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그 말씀은 모두 인간의 영혼을 살리기 위한 말씀들이다. 설사. 그가 남의 죄를 지적하더라도, 그것은 남의 죄를 정죄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상대방의 죄를 탕감하여 주기 위하여 상대방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정죄가 아니고 상대방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로서는 남의 죄를 탕감하여 준다는 말이 쉽게 자신들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인 중에서 지금까지 아무리 큰 교회를 운영하던 목사라도 아직 남의 죄를 사해주는 일을 하던 목자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말이 기독교인들 귀에 익숙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탕감하여 준다는 말은 예수께서나 하시는 말씀인데, 감히 인간주제에 누가 누구의 죄를 탕감하여 준다는 말인가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탕감을 받은 자는 그 또한 남의 죄를 탕감하여 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자, 예수께서 “내가 천국 열쇄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내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말씀하시는 것으로 봐서 사도 바울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또한 남의 죄를 탕감하여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 땅에 육체로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며, 현재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로서는, 그들 마음속에 아직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본인의 죄는 물론이요 남의 죄 또한 탕감하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남의 죄를 탕감하여 주려면, 먼저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먼저 탕감 받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남의 죄를 탕감해줄 수 있다. -귀 있는 자는 부활하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