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주일 낮 말씀
본문: 에베소서5:1-14
제목: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責望)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5:9-13).
책망(責望)받는 다는 말을 우리는 주로 야단을 맞는다는 말로 사용한다. 책망이라는 말을 헬라어로는 엘랑코라로 부른다. 이 말은, 권고하다. 책잡다. 꾸짖다. 이것을 영어성경(NIV)에서는 exposed--공격을 위하여 드러내다, 노출시키다로 쓰고 있다. 그리고 다른 영어성경(RSV)에서는 reproved-책망하다. 잔소리하다. 야단치다로 쓰고 있다. 그리고 한국어 표준 새 번역 개정판에서는 “빛이 폭로(暴露)하면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난다”로 번역하고 있다. 책망보다는 폭로라는 말이 현실에 더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폭로(暴露)”라는 말을 넣어 적용해보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죄를 폭로(暴露)하라!” 우리 생각 같아서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미덕 아니던가? 그런데 바울과 성경은 왜 폭로하라고 말하는가? 그 이유는 죄는 덮으면 덮을수록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라기 때문에 까발려서 죄로 하여금 숨을 곳을 주지 말라는 뜻이다. 야고보서를 보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죄(罪)는 인간이 성장함에 따라 함께 자라기 때문에 죄는 덮어주고 감싸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까발리고 폭로해서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숨을 곳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리고 더 나아가 죄가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남의 죄를 까발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남의 죄를 잘 못 까발리다가는 도리어 자신이 덤터기를 쓸 수 있다. 남의 죄를 까발리거나 폭로하고자 할 때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남의 죄를 폭로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눈에서 먼저 들보를 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그 죄가 자기 머리로 돌아오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기라성 같은 목사들이 즐비하지만, 함부로 성도들의 죄를 까발리거나 폭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 또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는 개를 나무라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종교지도자들 역시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도들의 죄 또한 까발리지 못하는 것이다. 목사들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지 못했다는 말은,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아직은 바울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지 못했다는 말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자기 마음속에 계시지 아니하면 절대 남의 죄를 까발려서는 안 된다. 남의 죄를 폭로하는 순간! 자기 자신 또한 남을 정죄했던 죄의 올무에 걸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사는 것이다. 죄를 덮어주는 미덕으로 여기고 살다보니, 이 세상에서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자는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매도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인들 겉은 번지르르 한데, 속은 썩을 대로 썩어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기독교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 역시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우쭐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그들의 죄를 까발리자, 유대인들이 예수를 좋아 할리 만무했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까발리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하여, 예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시인하도록 하여,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를 요셉을 아들로만 보고, 그가 하는 말을 곧이 듣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나, 부활하여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신 그리스도나 그가 우리 죄를 폭로하거나 까발리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에 비해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한 인간이 남의 죄를 들추어내는 것은, 남의 비리를 들추어내서 그를 사회에서 암매장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가 잘되는 것을 시기하여 벌이는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한 인간이 남의 죄를 함부로 까발리는 일은 화약을 짊어지고 스스로 불속에 뛰어 드는 불나방 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신을 의롭게 여긴 나머지 자기보다 못한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우습게보고 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는 서슴없이 마귀새끼들이라고 정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신 또한 그런 자들과 똑같은 자임을 망각하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유대인의 마음속에 숨은 죄악을 까발려 주셨다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방인 중에서 사도 바울 같은 자를 통해 다시 오셔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를 까발려주게 될 것이다. 그때 기독교인들 역시 교만한 자들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람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하는 말로 알아 듣고 몹시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비록 사람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나, 그 말씀은 분명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예수께서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앞에 부활하여 다시 오신 그리스도 역시 비록 사람의 입을 통해 하시는 말씀이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그가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신 것은,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들추어내자 기분이 나쁘다며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기독교인들의 죄는 그대로 자기 안에 남아 있게 된다. 살아생전에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자기 죄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죽게 되면,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된다.
이런 원리에 따라 바울은 “책망을 받는 모든 것마다 빛으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좀 더 현실감 있게 적용하기 위해서 책망(責望)이라는 말을 폭로(暴露)라는 말로 바꾸어서 시용해보자! 인간은 누구나 어둠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마음속에는 죄악이 가득하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을 모조리 폭로해 버리는 것이다. 이때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 입장이 아주 중요하다. 만약 자기 죄악을 까발리는데, 그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자기 죄를 시인하게 될 것이다. 그런 자는 그리스도의 책망이 도리어 자신을 빛 앞으로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가 하는 말을 별 볼일 없는 인간이 하는 말로 받아들여 기분 나쁘게 생각하게 되면, 그는 빛과 더욱더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천국은 동전의 양면성과 같아서 내가 어느 곳을 택하느냐 따라서, 천국으로 갈 수도 있고 또는 지옥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선택은 오로지 본인 몫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습관을 가지고 예수를 믿어보려 하였지만, 율법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습관으로는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율법아래서는 정해진 법에 따라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 되지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자신이 율법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죄를 알았다면 그 죄를 들고 예수 앞에 나가서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실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면 절대 예수를 믿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의 법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습관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어보려 하지만, 성령의 법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습관으로는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의 법 아래서는 정해진 법에 따라 예배당에 나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소와 양 대신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면 되지만, 기독교인들 역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부활하신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죄를 알았다면 그 죄를 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 나가서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실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 역시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면 절대 부활하신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기독교인들 역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배당에 나아가 예수 이름으로 예배드리는 것으로는 어림없고, 반드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마음속의 죄를 해결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이 기독교인들에게 구세주가 되는 것이다. 육신을 입고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는 오직 유대인들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이다. 이제 왜 기독교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를 책망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책망을 받고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 나오는 자들이 진정한 빛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