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그리스도의 주일 말씀
본문: 누가복음23:26-38
제목: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6-28)
당시 예수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여자들은, 예수로부터 병 고침을 받았거나, 귀신들린 것에서 나음을 입었거나, 죄에서 자유를 얻은 자들이다. 그중에 예수로부터 은혜를 입은 여자들이, 예수가 죽으러 가는 것을 보고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슬피우는 것이다. 그것을 보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당시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다. 죽으로 가시는 분께서 도리어 살아 있는 인간들을 걱정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나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도리어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하신 말씀은, ‘너희가 저들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너희가 너희 자녀와 더불어 지옥에 갈까’ 걱정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우매한 인간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니까 그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예수는 죄가 없는 하나님 아들이라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 하지만, 죄악 속에서 태어난 인간은 예수로 말미암아 죄를 해결 받지 못하면 다시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죽으면 슬퍼서 눈물 흘릴 수 있다. 하지만, 예수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이 나에게는 생명이 되기 때문에 도리어 은혜와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우리 인간들과 똑같은 분으로 생각하다보니, 당시 여자들이 예수가 죽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에 슬퍼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부활절이 되기전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이 받으셨던 고난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금식도 하고, 부부생활도 멀리하여 절제된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부활절 일주일 전쯤에는, 당시 예수께서 당하셨던 고난을 생각하며 몹시 슬퍼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했다고 의(義)를 내세우고 있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진짜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짊어져 보면서, 당시 예수께서 당하셨을 고난을 떠올려 본다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도리어 헛되게 하고 있는 짓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 눈앞에서 당장 예수가 죽으러 가는데, 그것을 보면서 울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고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데,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도리어 예수가 고통 받고 돌아가신 것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을 의(義)로 여기는 것이다.
오늘날 십자가 사건을 보며 슬퍼하며 애통해 하는 자들은, 한마디로 예수 믿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입술로만 예수 이름을 부르고 있을 뿐, 실상은 예수 믿는 자들이 아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있는 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을 슬퍼하거나 애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 사건을 은혜와 감사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더 겸손하고 낮아진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예수 이름만 부르는 자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교만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예수 고난에 함께 동참했다는 것을 도리어 자신의 의(義)로 여기고 우쭐되는 것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그런 사실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다보니, 애통해 하는 것을 의(義)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말로는, 예수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말은 한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해놓고, 행동은 불신자와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사도바울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고, '죽은 영(죄악)'이 기독교인들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입으로는 예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받으면 모든 죄악들이 사라지는 줄 알고 있지만, 성령을 받아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죄악들이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어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신의 정욕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악은 어떻게 해결 받아야 되는가? 예수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말게 된다”고 말씀하셨듯이,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은, 기독교인들 스스로는 절대 해결 할 수 없다. 자신도 소경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누구를 인도하며 누구를 구원하겠는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 나가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리고,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해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말씀을 듣고, 그토록 많은 예배를 드렸지만, 기독교인들 마음속은 하나도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받은 영적인 백성들이라, 겉 사람보다는 속 사람이 변화 되어야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지만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은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 역할을 하실 뿐,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하여 주시지 않는다. 이렇게 성령께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해결해주지 않다보니,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소경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소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시는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를 믿어야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고 속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된다.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 앞에 육체를 입은 예수가 오셔서, 율법을 거역한 유대인들의 죄를 해결해 주셨듯이,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에서 자유케 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가서, '자범죄'를 해결해 주시게 된다. '자범죄란?'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마음속으로 지은 죄를 '자범죄'라 부른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마음속의 죄를 해결받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
초대교회 당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이 천국복음이었다면, 오늘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셔서 전하는 복음이 천국복음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전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기독교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지금까지 죽도록 신앙생활하고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여 버림 받는다면 얼마나 억울 하겠는가? 바울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했듯이, 기독교인들 역시 그리스도가 전하는 복음이 진짜 천국복음이다. 그리스도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천사라도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한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들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믿는 자의 마음속에 직접 들어가시게 된다. 이는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영)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과 같은 이치다.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그리스도가 믿는 자의 마음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까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서 주인 노릇을 하던 죄악(귀신)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떠나게 된다. 이렇게 더러운 죄가 사라지게 되니까 그동안 인간의 마음속에서 죄(똥)를 먹고 살던 똥파리(귀신)도 같이 떠나게 되는 것이다.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어주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 순종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는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때도 그리스도 모형에 불과한 빵과 포도주를 먹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마음속에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모형에 불과한 것들을 먹고 마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이 자기 마음속에 심어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두고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으로 알던 것들이 패해질 것이라!"(고전13:10)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신 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주어서, 어둠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빛 앞으로 달려 나오도록 안내자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한 자는, 자신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생긴 자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을 보며 슬퍼하며 애통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죄로 말미암아 죽게 생긴 인간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을 걱정하고 있는 꼴이다. 입에 풀칠도 못하여 굶어죽게 생긴 자가 도리어 부자를 걱정하고 있는 꼴이다. 소경이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도리어 눈 뜬 사람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이렇게 우매한 길을 걷게 된다.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눈먼 소경의 길에서 벗어나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성령만 받아서는 빛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 인간들도 우매한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는 빛의 자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