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부딪히는 돌과 거친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거친반석 2021. 11. 14. 12:36

그리스도의 주일 말씀

본문: 로마서9:30-33

제목: 부딪히는 돌과 거친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9:33).

 

본문 말씀에 나오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로서, 부딪히는 돌은 유대인들 앞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이고, 거치는 반석은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 앞에는 이삭의 예표로 육체를 입은 예수가 오셔서 율법을 거역한 유대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셨던 것이고,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앞에는 야곱의 예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셔서,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게 된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부딪히는 돌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과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당시 자신을 의롭게 여기던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하는 일을 못 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자신들과 뜻이 맞지 않는다하여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는 율법아래 갇혀 있는 유대인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는데,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던 바리새인들이 사사건건 예수께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부딪히는 돌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말씀대로 부딪히는 돌을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고 하는 말은, 당시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쳐주자,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며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리라!' 말하자,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거늘 네가 어찌하여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냐?'며 예수를 귀신들린자로 여기는 것이다. 당시 이런 자를 믿는다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러나 그런자는 믿어도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마태복음21:42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당시 예수께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오셨으면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 표현하였겠는가? 예수는 그만큼 천한 모습으로 오셨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누구에게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예수께서 비록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오셨지만, 당시 어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 임금인 마귀가 천하만국과 세상 영광을 다 주겠다며 시험을 해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안했다. 이에 비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떤가? 말로는 하나님 자녀라고 말하면서 마귀와 세상이 주는 떡을 덥석덥석 잘도 받아먹고 있다. 이를 보면 기독교인들은 아직 하나님 자녀라고 말할 수 없다.

 

유대인들이 율법아래서 이천년을 살다보니 자신들이 율법아래 갇혀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육체가 병들지 않는 자들은 자동으로 의인이 되었고, 육체가 병든 자들은 자동으로 죄인이 되고 만다. 문제는 자신을 의롭게 여기던 자들이 예수와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가령,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셨기 때문에,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자신을 의롭게 여기던 자들이 ‘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냐’며 시비를 거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아버지 품속에서 나오셨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해도 전혀 죄가 되는 않는다. 그런데 이를 모르는 유대인들은 ‘자칭 네가 사람이 되어가지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 하는 것이냐’며, 예수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로서는 예수가 하는 일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보니, 이렇게 사사건건 예수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자신을 의롭게 여긴 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율법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저주로 육체가 병든 자들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기 위해서, 율법을 거역하고 로마의 앞잡이로 세금 걷는 일을 하던 세리와 몸을 팔던 창기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예수를 찾아왔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들이 율법을 거역하고 지은 죄를 모두 사해주셨다. 결국 자신을 의롭다고 하던 자들은 천국의 문턱에서 미끄러지게 되었고, 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자들이 도리어 죄 사함을 받고 먼저 영생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떨까? 서두에 ‘거치는 반석이란?’ 야곱의 예표로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했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처음 듣는 이런 말이 당장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천년 전에 이삭과 야곱을 예표로 세우시고, 장차 유대인들 앞에 보낼 하나님 아들과 이방인들 앞에 보낼 하나님 아들을 미리 정하시고, 그것을 이삭과 야곱의 예표를 통해 미리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한분으로 이방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까지 모두 해결해 주실 것 같았으면 굳이 야곱을 또다시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는 오직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지은 '자범죄(율법을 거역한 죄)'만 해결하여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지은 '자범죄(마음속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야곱의 예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방인들 앞에 또다시 보내주시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방인들 앞에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직접 들어가서,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지은 '자범죄'를 해결하여 주시게 된다.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지만, 기독교인들로서는 누구도 이런 비밀을 알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아직도 기독교인들은 죄아래 살고 있는 종의 신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밀은 오직 하나님 품속에서 나오신 아들(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이 알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지만, 아직 기독교인들은 '양자의 영(그리스도)'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 부를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가 유대인들과 사사건건 부딪혔다면, 이방인들 앞에 거치는 반석으로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될까? 거치는 반석이란? 다듬지 않는 돌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도께서 비록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셔서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이 너무도 거칠고 험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치는 반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거칠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들을 들추어 내기 위해서 일부러 거칠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겉다르고 속다른 이방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일부러 험악하고 거칠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죄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도 이런 죄악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고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생각에 모두가 겉으로는 착한 척 선한 척하고 있다. 하지만, 속에는 아직도 노략질 하는 이리떼가 가득 들어 있는데, 구원 받았다며 겉으로 선한 척 착한 척하고 있으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험악한 말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들을 들추어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심한 욕이라도 해서 기독교인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실은 자기 마음속에 들어있는 '죽은 영(귀신)'이 기분이 나뿐 것이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욕이라도 해서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하여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기분이 나쁘다며 도리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떠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심한 욕이라도 해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들을 들추어 내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욕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물며, 세상 사람도 함부로 욕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계시다는 자가 함부로 욕을 하고 험악한 말을 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욕한다고 트집을 잡는 이유는, 실은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죽은 영(귀신)'이 인간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따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욕이라도 해서 겉으로 고상한 척하고 있는 자들의 죄악을 들추어 내려는 것인데, 기독교인들이 그것이 기분 나쁘다며 그리스도를 멀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죄악을 지적하자, 그것이 기분 나쁘다며 예수를 믿지 않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좋은 말로 하면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좋은 말로 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은데 어떻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바로 걸림이 되어 그리스도를 믿기가 힘든 것이다. 세상 이치로 따져볼 때 욕하는 자를 어떻게 구세주로 믿을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예수가 안식일을 거역하고 다니자, 그것이 걸림이 되어 예수를 믿지 못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거친 반석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험악한 말이라도 해서 기독교인들의 죄를 깨닫게 하려는 것인데, 기독교인들에게는 그것이 걸림이 되어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바울은 반석(盤石)을 그리스도로 표현하고 있다. 반석이란? 단단한 돌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 역시 세상 어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신이 주는 모든 시험을 다 물리치고 이겨낼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가 마귀가 주는 시험을 이기고 유대인들을 마귀 발아래서 구원하였듯이, 이방인들 앞에 오신 그리스도 역시 귀신이 주는 시험을 이기고 기독교인들을 귀신의 소굴에서 구원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고 신앙생활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마가지 못해서 세상과 타협하며, 귀신이 주는 떡을 덥석덥석 잘도 받아먹고 있다. 그러다보니 악한 영이 주는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에 가서는 모두 넘어지고 말게 된다. 특히 기독교 목사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목사들 마음속에 반석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는 말은, 그들 마음속에 '죽은 영(귀신)'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죽은 영'은 인간들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영적인 존재로서, 가정에서는 부부사이를 이간질시켜서 분란을 조장하고, 부모와 자식사이를 이간질시켜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그리고 가족이나 형제간에도 불화와 다툼이 일어나게 하고, 교회 안에서는 성도와 성도사이를 이간질시켜서 교단과 교회를 나누게 한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만 보고, 성령으로 하나 되자고 목이 터져라 외쳐보지만 지금까지 기독교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자꾸만 나뉘게 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성령으로 하나 되자고 외쳤던 것은, 바울은 성령도 받고 바울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현제 성령은 받았지만, 마음속에는 그리스도 대신 '죽은 영'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가 되려면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속에서 인간을 이간질 시키는 '죽은 영(귀신)'을 몰아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하나가 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나 가정이나 분열과 다툼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들 마음속에 '죽은 영'이 주인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석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자는, 인간을 이간질 시키는 '죽은 영'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절대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마음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신 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절대 교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 그것부터 아는 것이 급선무이다. 자신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면 절대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자신을 의롭게 여겼지만,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해서 예수를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똑같다.

 

생각해 보시라!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아 구원 받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전혀 보잘 것 없는 자가 나타나서 기독교인들의 삶과 행실이 온당치 못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은 죄악들을 낱낱이 모두 까발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죄를 지적하자 길길이 날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해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가 들어나자, 기분 나쁘다며 얼굴을 붉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인간을 충동질시켜 그리스도 곁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한 영이 인간을 이간질 시켜서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으로 여기고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는 말이 모두 맞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믿는 자의 마음속에 단번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서 죄를 짓게 하던 ‘죽은 영(귀신)’들을 모두 쫓아내고, 그리스도가 인간의 주인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이 주인이 되어 주시자, 그제야 비로소 자기 마음속에 천국이 임하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자기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신 자는 절대 세상과 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가질까? 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져도 늘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항상 걱정과 염려속에서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말했듯이, 거친 반석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