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다.

거친반석 2014. 1. 5. 14:47

본문: 로마서3:9-18

제목: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바울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그것은 바울이 율법아래 살 때는 자신도 의인(義人)이요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었던 사람으로 여겼으나, 예수를 만나고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보면, 계속해서 율법 아래서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의 삶을 비교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회심은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다. 하루 아침에 아군이 적군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후 사사건건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 눈에 가시 같은 존재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을 향해서 거침없이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3-18)” 바울이 기록한 이 말은,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글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들을 가리켜 한 말이다.

 

 

바울은 왜 자기 동족들을 향해서 이런 무수무시한 말을 내뱉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후 자기 동족들을 살펴보니, 모두가 사단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바울의 이런 말은 자신들을 모독함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동족들을 깨닫게 할 목적으로 이런 말을 하였지만, 바울은 이로 인하여 자기 동족들에게 여러번 죽을 고비를 당하기도 했다.

 

 

아마 바울이 예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바울 역시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영)으로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고 보니, 비로소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율법아래 살던 자기 동족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게 할 요량으로 여러 가지 말로 당부를 해보지만,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변절자로 매도하며, 그를 죽여 없애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파란 만장한 삶을 보며, 믿는 자가 하나님 법아래서 백성으로 살아갈 때의 모습과 그리스도로 거듭난 후, 하나님 자녀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바울의 삶을 통해서 마음속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바울이 만약 예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 역시 하나님의 섭리도 모른 체 죄악 속에서 허우적대다 인생을 끝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영으로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고 보니, 그제서야 자신이 소경이었음을 깨닫고 어둠속에 살고 있던 자기 동족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고 있을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던 예수를 믿고 성령까지 받았으니까 혹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제대로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기독교인들 역시 현재는 어둠속에 살고 있는 ‘영적인 소경’임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이런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겠지만, 현재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상태는 마치,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과 똑같은 상태이다.

 

 

기독교인들을 ‘영적인 소경’이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기독교인들 역시 바울처럼 하나님을 제대로 알려면 영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만 가능하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우리는 예수를 믿고 성령까지 받아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 아니냐?”며 항변 할지 모르겠지만, ‘성령’은 아버지의 영으로서 ‘그리스도 영’이 아니다(마10:20참조).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으로는 절대 거듭날 수 없다.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원죄’를 사함 받은 것에 불과하다.

 

 

‘성령’은 하나님의 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 마음속에 ‘영적인 율법’을 주러 오신 분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영적인 율법’을 마음속에 받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령으로는 결코 거듭날 수가 없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자꾸만 ‘성령’‘그리스도 영’으로 동일한 영으로 간주하여 거듭났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경이 말하기를, 법은 죄를 깨닫게 할뿐,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성령의 법’ 또한 기독교인들 마음속의 죄를 깨닫게 할뿐 결코 기독교인들을 거듭나게 하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현제 ‘성령의 법’아래 사는 백성의 신분일 뿐,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다. 이방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성령과 더불어 ‘영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고 ‘양자의 영(그리스도 영)’을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현제 기독교인들은 성령(율법)만 받아갖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고 ‘양자의 영’을 받은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 말할 수 없다. 더군다나 아직 이방인들 앞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적인 아들’을 보내주신 적이 없기 때문에 ‘양자의 영’을 받은 자가 아직은 없는 것이다.

 

 

성령의 법아래 사는 기독교인들이 ‘양자의 영’을 받으려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한다.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하나님 아들이란?”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말한다. 바울이 겉으로 보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지만, 그 마음을 붙잡고 사용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당시 바울이 하는 말을 믿는 자는 곧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사함 받고 ‘양자의 영’을 받아 바울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영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양자의 영’을 받게 되면, 비로소 영적인 소경에서 벗어나서 자기 동족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아직까지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그런 자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성령의 은사’로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는 있지만, 기독교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할 자는 아직 없다. 그러나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고 ‘양자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는 바울처럼 자기 동족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지적할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바울이 자기 동족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은, 너무나 자기 동족들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술로는 하나님 이름을 부르고 있었으나 정작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의 기득권과 자기 명예를 드높이려 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고,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똑같이 그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입술로는 하나님 이름을 부르나 마음은 악독이 가득하여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롬3:13-18)”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역시 살았다고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그들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기독교인들을 배나 ‘지옥자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자식’ 만들고 있다는 말은, 그들 말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기록한 이 말씀을 자기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한구절도 믿지 않는 불신자를 위해서 기록한 글이 없다. 모두 믿는 하나님 백성들을 두고 기록한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이런 지적에 대하여 대단히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이 구원 받지 못했다는 증거다. 진정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는 이런 말에 전혀 기뿐 나쁠 것이 없다. 자신을 그리스도 앞에서 죄인으로 인정하고 구원 받았기 때문에 기분 나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 받지 못 한자는 누가 조금만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도 바로 역성을 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고 ‘양자의 영(그리스도 영)’을 받은 자가 나타나게 되면, 바울보다 훨씬 더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지적하게 될 것이다. 계시록에는 주님 앞에 세워진 ‘일곱 교회’(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세를 받은 자)와 그리스도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은 하나님 아들들이 십사만 사천 명이나 나타나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십사만 사천 명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자들이다. 신천지가 말하는 십사만 사천 명과는 차원이 다르다.

 

 

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은 ‘성령의 법’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을 비롯하여 타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과 불신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여 ‘일곱 교회’ 앞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 아들들이 전하는 ‘천국복음’이다. 하나님 아들들로부터 천국복음을 듣고 ‘일곱 교회(영적으로 오신 주님)’ 앞으로 달려 나오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사함 받고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타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과 불신자라도 영적으로 오신 주님 앞으로 자신의 죄를 들고 달려 나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천국으로 인도받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2천년 역사와 마찬가지로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한 기독교 2천년 역사도 이제 그 끝을 보이고 있다. 봄에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해서다. 그러나 열매를 얻기까지 농부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처음에는 씨앗이요 그 다음은 잎과 줄기요 그 다음은 열매다. 농부는 실한 열매를 얻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가을이 되어 수확할 때 농부는 잎과 줄기를 수확하지 않는다. 농부는 오로지 열매만 수확한다. 하늘나라도 이와 마찬가지로 잎과 줄기를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열매만 수확한다. 잎과 줄기는 이스라엘 2천년 역사이며, 기독교 2천년 역사이다. 그 속에서 구원 받은 자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2천년 역사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아들을 믿고 나오는 자들을 여름실과로 수확하였다. 그들은 지금 하늘나라 곡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 2천년 역사도 그 끝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앞에도 어김없이 당신의 ‘영적인 아들’을 보내서, 기독교인들 중에서 당신의 아들을 믿고 나오는 자들을 ‘가을 알곡’으로 수확하게 될 것이다. 비워있는 하늘나라 곡간을 이방인 중에서 알곡으로 나오는 자들로 채울 것이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하나님 곡간에 들어갈 알곡인지, 아니면 자신이 쭉정이로 버림받게 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성령의 법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장차 영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아들을 믿을 수 없다. 바리새인들이 눈앞에서 하나님 아들을 보고도 못 믿었던 것은, 자신의 의(義)로 마음이 한껏 높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마음이 높아져 있다면, 그런 자는 스스로 자신의 눈과 귀를 닫고 있어서 하나님 아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귀를 닫고 있으면 아들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게 되니, 결국 자신의 죄악 또한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알곡과 쭉정이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보기에는 정통교단에 속한 자들은 알곡이요 이단에 속한 자들이 곧 쭉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정통 교단에 속한 자나, 이단에 속한 자나 모두 성령의 법을 거역한 죄인들이다. 그런 죄인들 중에서 어느 누가 하나님이 보낸 아들 믿고 나오느냐? 못 믿느냐에 따라서 알곡과 쭉정이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알곡이 되고 못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영적인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