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10:1-15
제목: 율법과 성령의 법의 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의 탄생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이후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 자식이 없던 그에게 약속의 자녀로 이삭을 주고, 이삭은 다시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를 낳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큰 자를 버리고 작은 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12지파를 낳는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자 열두 아들들과 그 가족들이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서 430년을 종살이 하게 된다. 종살이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닷가 모래알처럼 불어나게 되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도록 명령하신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너고 바란 광야를 지나 시내산에 도착하여 모세를 통하여 두 돌 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받는다. 십계명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고 살아가야할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만드는 근간이 되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은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들을 모두 율법아래 가둔 다음,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다.
1, 유대인에게 주어진 율법과 복음
신약성경(복음)은 구약성경(율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읽고 보아야할 구원의 지침서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구원) 되었다고 믿었던 나머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 보니,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율법을 지켜보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죄 아래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 법을 지켜보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도리어 자기 의(義)만 더 쌓게 된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비유로 자신들이 율법을 거역한 죄인임을 깨닫도록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죄를 지적하는 예수를 도리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신약성경에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에 이르게 되는가 하는 내용들이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대인 어느 누구도 예수가 하는 말을 곧이듣지 안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은 이미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의롭게 되었다고 하니, 예수를 믿는데 당연히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아들을 믿고 모두가 영생에 이르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2천년 동안이나 율법아래 가두고 마지막에 하나님 아들을 보내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들을 믿기는커녕 도리어 율법으로 의롭게(구원)되었다며 아들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2천년 동안 계획하신 것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아침에 짓밟아버린 것이다. 물론 그들 속에서도 법을 어겨 하나님의 저주로 몸이 병들었던 자들과 자신을 죄인으로 낮춘 자들은 아들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영생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쉽게 믿지 못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나를 믿으라고 했던 말이다’ 성전을 헐라는 말은 사실상 유대인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걸 헐고 ‘나를 믿으라고’ 했으니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몹시 흥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내 피와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인간의 인육(人肉)’을 먹으라는 말로 알아듣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서 예수를 죽여 없애자고 하는 것이다. 당시 제자들마저도 예수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했다. 하나님 품속에서 나오신 아들의 생각과 땅에서 하나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백성들의 생각이 이처럼 차이가 난다. 당시 기라성 같은 율법학자들이 즐비했지만, 어느 누구도 예수가 한 말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죄 아래 살고 있는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깊은 뜻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고,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자라도 결코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깊은 뜻은 오직 하나님 품속에서 나오신 아들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로 거듭나야만 가능하다. 죄 아래 사는 인간이 하나님 속성을 알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가 내 마음속에 계셔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하나님의 속성 또한 모르다보니, 계속해서 예수께서 하시는 일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방해를 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었더라면 그들 모두가 예수를 믿고 영생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보니 도리어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예수를 믿지 못하고 사단의 자식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영적인 율법과 영적인 복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을 보며 신앙생활 하고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영적인 율법’(마음속에 주신 법)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신약성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이 있었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아주 고마운 책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신약성경을 통해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신약성경을 통해서는 오직 자신의 죄를 깨달아 가는 것이 이방인으로서는 최고의 축복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신약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이 기독교인들에게 최고의 축복이 되는 이유는,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아들을 믿을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구원의 지름길로 삼고 있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구원의 지름길로 삼고 있는 것이나 같은 이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신약성경 말씀대로 살수 있다면,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겠지만, 이 중에 단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을 어긴 것이 되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하나님 법(말씀)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겠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이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주의 날로 지키고 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실지로 도둑질을 해야 죄라고 여겼으나, 신약에서는 마음속으로 남의 것을 탐내는 것도 모두 죄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여자와 간음을 해야 죄가 성립되지만, 신약에서는 마음속으로 음욕만 품어도 죄라고 말하고 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이렇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모두 신약성경에서 따온 것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방인들이 율법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율법아래 살던 사람들이라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율법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도 유대인들처럼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는 오직 율법 아래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범죄’(율법을 거역한 죄)만 사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누구를 통해서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해결 받을 수 있을까? 이방인들은, 오직 이방인들 앞에 오신 영적인 아들을 믿어야 ‘자범죄’(성령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고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는 육체로 오신 아들을 보내주시고, 기독교인들 앞에는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보내주시는 것은, ‘자범죄’는 인간이 직접 지은 죄이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오신 아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직접 고백하고 사함 받으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자꾸만 자신들도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구원 받았다며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자범죄’와 ‘원죄’를 모두 사함 받기 때문에 구원에 들어가게 되지만, 하나님 법도 없이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인들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그때야 비로소 ‘원죄’ 한 가지를 사함 받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첫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았어도 마음이 부패한고로, 어느 누구도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은 기독교인들도 마지막에 가서는 모두가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 되고 만다. 이로써 기독교인들도 모두가 성령의 법아래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지은 ‘자범죄’이다. 성령의 법아래 갇힌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방인들 앞에도 하나님의 영적인 아들이 오시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영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자범죄’(성령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고 영생에 들어가게 된다.
이방인들 앞에 예수께서 영으로 다시 오시는 과정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 하신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그리스도 영이 되어, 맨 먼저 다메섹 도상에서 빛(영)으로 바울 속에 들어가셨다. 바울 속에 들어가셨던 예수께서 이방인 중에서 미리 선택한 한 사람을 통해서 영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신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예배당에 나아가 예배드리는 일을 그만두고 “영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주일예배와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지만 그것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답시고 불쌍한 사람들을 데려다 돌봐주고, 길거리에서 밥 퍼주는 일을 계속하더라도, 결코 그런 행위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유대인들처럼 육체로 열심을 내서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짓이니, 이렇게 하면 오히려 자기 의(義)만 쌓게 되어 도리어 하나님과 원수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육신으로 내는 열심을 그만두고 “영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는 말씀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처럼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 하나님 아들이 하시는 말씀에 콧방귀도 안 뀐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의기양양한 것은, 자신들은 이미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 모두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웬 미친놈이 나타나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처럼 2천년을 오직 성령의 법아래서 살다보니, 영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어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도적같이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신다고 누차 말씀하고 있지만, 그런 말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공중에 오실 예수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공중에 오실 때는 이미 땅에서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진 상태로서 마지막 심판을 의미한다. 그때는 기독교인들이 아들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의 잘못은 잘도 지적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법에 대해서는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남의 잘못은 칼처럼 지적하면서 왜 그 칼끝이 자신을 향해서는 관대하게 적용되는가? 바리새인의 경우를 보면, 세리와 창기들에게는 엄한 율법을 적용시켜서 더러운 죄인이라고 상종도 못하게 한다. 그러나 율법을 자신들에게 적용시킬 때는 관대하기 이를 데 없다. 이렇게 때문에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던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자신들보다 좀 못한 사람들에게는 엄한 성경말씀을 적용시켜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거나, 또는 자기 교단 교리와 맞지 않으면 서슴없이 이단으로 정죄한다. 그러다가도 자신들에게 신약성경을 적용할 때는 관대하기 이를 데 없다. 기독교인들 앞에도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면 과연 어떻게 말씀하시겠는가?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신약성경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쳐야 한다. 그리하여 신약성경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두가 죄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장차 오실 영적인 아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자신을 믿으라고 했던 것은,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행위로는 결코 유대인들 마음속의 죄가 도말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아들이 오셔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이제 예배드리는 일을 그만두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인들 또한 예배를 드려서는 결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 돌보아주고 또한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결코 그런 일로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의 죄악이 도말되지 않는다. ‘구원이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가 도말되고, 그리스도가 영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셔야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어떤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방법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서 죄악이 도말 되려면 오직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이 무엇인가 교회 일을 열심히 해서 구원에 이르겠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아무리 열심을 낸다 해도, 결코 바리새인의 열심을 따라갈 수 없다. 열심으로 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서 바리새인들을 따라갈 자가 없다. 그런 바리새인들이라도 자신들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들의 행위는 도리어 자기 의(義)만 쌓게 되어 하나님과 원수만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바리새인의 삶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는가? 기독교인들 역시 지금 상태로 보면 바리새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가 열심을 내서 구원에 이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바리새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장차 오실 하나님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성령의 법’(예배, 십일조, 충성, 봉사등등)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려 한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영락없이 자기 의(義)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역시 사람을 통해서 거친 반석(磐石)으로 오시는 분을 하나님 아들로 믿기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동안 교회에서 성령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는데, 그것을 내려놓고 누군지도 모르는 분을 하나님 아들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성령을 소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영적으로 오신 아들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땅에서 알곡으로 인침 받아 마지막에 예수가 공중에 오셨을 때 들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들은 쭉정이로 버림받게 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