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거친반석 2015. 4. 19. 13:38

주일 낮 말씀

본문: 마태복음11:25-30

제목: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율법 아래 살게 하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를 율법아래 가두고 죄인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으로 의롭게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는 죄인보다 의인(義人)들이 더 많았다.

 

하나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를 율법아래 가둔 다음,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율법아래 갇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과는 다르게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죄인이 되어 있기는커녕 의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기라성 같은 율법학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신 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죄 아래 태어난 인간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례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12)라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무슨 일을 하고나서 반드시 자신의 의()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이런 예는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율법은 잘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도리어 하나님 앞에 더 죄만 짓게 된다. 육신으로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다 보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열심을 내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을 의롭게 여긴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을 업신여기며 깔보는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들을 업신여기게 된 것도 모두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율법 아래서의 삶은 그것이 아무리 거룩해 보이고, 온전해 보일지라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인간을 판단할 뿐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뿐이다. 그런데 인간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 하여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심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자들은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빼내지 않고 남을 정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죄가 결국 자기 머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런 일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피 흘림을 통하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받은 성령은 율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에게 영적인 율법역할을 하라고 보내주신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나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성령이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다 보니,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열심히 교회만 다니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의 법 아래서는 아무리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고 온갖 노력을 다해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가 해결 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 역시 자신의 죄가 해결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함부로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 죄가 자기 머리로 돌아오게 된을 알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기독교인들을 온전케 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러 오셨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성령 받은 것으로 남을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기독교인들을 성령의 법아래 가둔 다음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을 율법 아래 가둔 다음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다보니 모두가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우쭐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현재 기독교인들이 드리고 있는 예배 하나만 보더라도, 새벽예배를 비롯하여 수요예배, 금요철야, 주일 낮 예배와 저녁 예배, 그리고 구역예배까지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예배를 드린다고 하여 기독교인들 마음속의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이런 예배를 계속 드리고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힘든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바로 율법의 무거운 짐이다. 기독교인들이 율법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지만,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 때문에 성령이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직접 들어가지 못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듣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 밖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은사(천사)를 통하여 감화 감동으로 말씀을 받고 있다. 이러다보니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아직 마음속이 온전케 된 자가 없다.

 

이는 마치 구약 때 성령께서 유대인들의 죄 때문에 마음속에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인간의 몸 밖에서 감화 감동으로 말씀을 넣어주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오셔서 유대인들의 죄를 사해주시자 비로소 성령께서 유대인들 마음속에 직접 말씀을 넣어주셨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 이름만 부르게 되어도 율법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게 되어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율법 없이 살던 이방인들이라 예수 이름을 불러도 마음속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이 기독교인들 마음을 직접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직접 지배를 받기 위해서는 이방인들 앞에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먼저 사함 받아야 한다. 죄를 사함 받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믿는 자들 마음속에 들어오시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가로 막힌 죄악의 담이 허물어지게 되어 기독교인들도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 자는 다시는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자신의 선생이 되어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법아래 살던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면, 지금까지 성령 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것을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 일주일에 몇 번씩 드려야 하는 예배도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다. 이는 자기 마음속에 계신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주기 때문이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23:8-10).

 

그러나 마음이 조급한 자들이 영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신령을 말씀을 찾아다니다가 그만 적그리스도 영을 받은 이단에게 끌려가서 인생을 망치고 있다. 사단도 참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이단들이 한발 앞서서 신령한 말씀을 찾아다니는 자들을 미혹하여 자기 하수인 삼아 버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목사)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4:1).

 

오늘날 제아무리 성령을 충만한 자라도 또는 큰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나, 유명한 부흥강사라도 세상 유혹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그들이 세상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계셔야할 그들 마음속에 세상 것(죄악)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자신들 말로는 자기 속에도 성령과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절대 그들이 세상과 짝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과 그리스도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가 없는 굴에서 토끼가 왕 노릇 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종놈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종들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였을 지라도, 이제는 주인의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종들은 제 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주인의 아들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종들이 계속하여 주인 노릇을 하겠다고 덤비게 되면, 그는 결국 주인으로부터 영원히 쫓겨나고 말게 될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는 큰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도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한 종에 불과하다.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3:5-6).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모세보다 더 큰일을 하였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다고 여기거든 이제 기독교인들은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로부터 긍휼함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이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종교적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때만이 얻을 수 있다. 천국의 주인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 죄인들을 부르고 계신다. -귀 있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