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거친반석 2017. 12. 24. 16:06

주일 낮 말씀

본문: 마태복음25:31-46

제목: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양치는 목동들이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각각 다른 곳에 두듯이, 예수께서도 마지막 날 악인과 의인을 갈라내어 악인들은 영벌에 처하게 하고,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양과 염소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볼 것이며, 더 나아가 기독교 2천년 역사 마지막에 사도 바울 같은 자를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셨을 때, 그를 배척하는 기독교인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이르기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입혔고, 병 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자 의인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그리고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 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이번에는 왼편에 있는 염소(악인)들을 향하여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 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말씀 하시자, 이때 악인들이 가만있지 아니하고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 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읽고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자신은 틀림없이 오른편에 있는 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들어보면, 자신이 양인지 염소인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하니까 아하! 그렇다면 나도 어린 아이(작은 자) 하나를 잘 대접하면 이것이 곧 예수께 하는 것이구나!”하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또 어떤 자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도와준 것을 가지고 예수께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이것도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영적인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둠속에 사는 인간들이 영적인 말씀을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세상적인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그런 차원에서 기록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란?” 결코 어린 아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리고 소자(小子)”라고 표현하는 말씀도 결코 어린 아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럼 예수께서는 어떤 자를 두고 지극히 작은 자또는 소자(小子)”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예수께서 지극히 작은 자 또는 소자라고 일컫는 자는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죄인으로 철저히 낮추고 있는 자를 두고 작은 자 또는 소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무조건 죄인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모두가 작은 자 또는 소자(小子)”가 아니라는 것이다. 죄인도 두 부류의 죄인이 있다. 한 부류는 입술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있고 또 한 부류는 마음으로 깨달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있다. 입술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는 작은 자 또는 소자(小子)”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런 자는 자기 생각 속에서만 죄인이라고 고백할 뿐, 자기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의 본성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자신을 낮추려 해도 낮아지지 않는다. 자신이 낮아지지 않으면 사단의 특성을 따라 인간은 높아지게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자들을 두고 작은 자또는 소자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자기 죄를 마음속으로 깨달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은 작은 자 또는 소자(小子)”로 부르게 된다. 예수께서는 왜 그들을 작은 자 또는 소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들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제대로 깨달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들 중에서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기 죄악을 깨닫고 나온 자가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자기 생각 속에서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일 뿐,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진정으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없다. 컴컴한 어둠속에 사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나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좋은 예로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를 가편투표로 죽이고 말았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찾아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후, 자신이 비로소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바로 사도 바울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진정한 죄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바울처럼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령만 받아서는 결코 진정한 죄인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를 다음 글에서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고나면 모두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데, 이때 성령을 통하여 깨닫는 죄는 세상에서 지은 죄나 또는 육신으로 지은 죄를 깨닫는 것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성령은 하나님 영으로서 예수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를 통해서 마귀를 심판하고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을 마귀 발아래서 나오게 하여,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하나님 백성을 삼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영적인 율법(마음속에 주신은 율법)”을 주러 오셨다.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초대교회로부터 현재까지 2천년 동안 죽도록 신앙생활 하였지만,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사도 바울처럼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나온 자가 없다. 그 이유는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라면 기독교인들은 진즉에 마음속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죄 아래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세상에서 지은 육신적은 죄만 깨닫게 할뿐 마음속의 죄는 깨닫게 하지 않는다. 마음속의 죄를 깨닫게 할뿐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 한분으로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전적으로 일임하신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과정이다. 이제 잠시 후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인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자신이 진정한 죄인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자를 두고 작은 자 또는 소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렇게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작은 자또는 소자(小子)”라고 하니까 무조건 어린 아이를 떠올리고 또 헐벗고 굶주렸다고 하니까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가지고 예수께 하였다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을 작은 자라고 낮추어도 그리고 자신을 아무리 소자(小子)”라고 낮추어도 인간의 마음속에 죄악이 들어 있는 이상 작은 자또는소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듯이 아무리 입술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해도 그는 자기 생각 속에 들어 있는 죄를 입술로 고백할 뿐,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전정한 죄인이 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스스로 깨달아 고백하게 된다면, 굳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실 필요가 없다. 십자가에 죽었다가 심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셨던 예수께서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시는 이유는,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만약 성령께서 그것을 깨닫게 하셨다면 예수께서 굳이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지은 죄만 깨닫게 하실 뿐,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오직 아들에게 맡기신 일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셔야 하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과 달리 위계질서가 철저한 곳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따로 있고, 아들이 하는 일이 각각 따로 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걸 구분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하는 일을 아들이 해도 되고, 아들이 하는 일을 아버지가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사단의 나라도 마귀가 하는 일이 따로 있고, 귀신이 하는 일이 각각 따로 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걸 구분하지 못하고 무조건 마귀나 귀신이 하는 짓으로 보기 때문에 악한 영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이다. 마귀는 인간들로 하여금 함정에 빠지도록 미혹하는 일을 한다면, 귀신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직접 죄를 짓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 피와 살을 먹어야 한다고 하는 말은, 예수 피는 마귀를 심판하고 인간들을 마귀 발아래서 건져내는 역할을 하고, 예수 살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도말하여 인간의 마음속에서 죄를 짓게 하는 죽은 영(귀신)들을 모조리 쫓아내는 역할을 하신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도 모르면서 성찬식 때마다 빵과 포도주는 계속해서 먹고 마시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 같은 자를 통해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셨을 때, 지극히 작은 자 그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작은 자 또는 소자(小子)”를 섣불리 판단 할 것이 아니라, 어느 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가를 찾아내서 믿어야 한다. 단언컨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절대 높은 자리에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절대 화려한 곳에도 계시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를 보라! 인간들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천하를 호령하고 있지 않던가? 과연 그런 곳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계실 수 있겠는가? 여러분들은 크고 화려한 교회가 좋아 보이고, 유명한 목사가 훌륭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결코 그런 자들 속에 계시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낮은 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도 초라하기 짝이 없이 오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부활하신 그리스도 역시 가장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를 통해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듣고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점검해보라! 그리하면 자신이 오른편에 있는 양인지 또는 왼편에 있는 염소인지 단번에 구분이 갈 것이다. 이것으로 자신의 앞날을 알게 되리라! -귀 있는 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