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다른가?

거친반석 2014. 1. 5. 14:12

본문: 고전13:1-13

제목: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다른가?

 

바울은 고전13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고전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7)

 

이방인들이 맨 처음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게 된다. 성령은 하나님 영으로서, 예수의 흠 없는 피로 말미암아 원죄를 사함 받았다는 증거로 이방인들에게 보내주신 아버지의 영이다.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각각의 은사를 부어주시는데, 이때 부어주신 성령의 은사는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이방인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기 위해서다.

 

성령이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마음속에 주신 법)역할을 하고 있다면, 성령의 은사는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는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었을 때 잘 믿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실체로 보고 구원이라고 믿고 있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기도 전에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율법으로 유대인들이 의롭게 될 수 없듯이, 기독교인들 또한 성령의 은사로는 어느 누구도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고전13장에서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내속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내속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바울의 고백은 한마디로 그리스도가 없이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오늘날 주의 종들이 성령의 은사로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살라서 남을 이롭게 한들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실체가 아니라 모형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만으로는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바울의 이 말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자신의 마음속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은 아버지의 영으로서 결코 그리스도 영이 아니다. 따라서 아직 기독교인들 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직 이방인들 앞에는 영적인 아들을 보내주지 안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아직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가 그리스도의 실체라면, 사도 바울은 괜히 쓸데없는 말씀을 나열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고전12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설명한 후 또 다시 고전13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같은 것이라면 굳이 따로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바울의 설명을 들어보면 분명히 고전12장과 고전13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다음 말씀에서 “사랑”“은사” 부분을 명확히 구분지어 말하고 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그리스도)이 올 때에는 부분적(은사)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8-10)”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왔을 때, 인간이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설명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법아래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마치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때와 같은 이치다. 바울도 그 당시 기고만장하여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마냥 날뛰었지만, 그가 예수를 만나고보니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동안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모든 학문과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날 뛰던 자신의 행동을 깊이 뉘우치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대변한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로 거듭 난자의 모습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개개인적으로 신앙생활 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는 은사를 통해서 남에게 많은 유익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는 어디까지나 영적인 아들이 올 떼까지만 그리스도의 부분적인 것들을 기독교인들에게 보여줄 뿐 온전한 것이 아니므로,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그리스도의 전부라고 생각하여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바울도 고전13장에서 이런 내용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현재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를 맛보고 있지만, 장차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앞에도 영적인 아들을 보내주시면, 그때는 기독교인들도 은사로 하던 것들을 모두 폐하고 그리스도 영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것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를 두고 바울은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온전히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다.

 

이스라엘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던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예수께서 그리스도 영이 되어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속에 먼저 오셨듯이, 이방인들 앞에 오실 때에도 이방인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를 통해서 영으로 오시는 것이다. 이를 두고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재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이방인들은 이렇게 오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어야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