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거친반석 2014. 1. 5. 14:14

본문: 누가복음5:27-39

제목: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인간은 누구나 안주하려는 습성이 있어서 새것보다는 옛것을 더 좋아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대부분 변화 받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는 새것보다는 옛것이 더 좋은 것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죄 아래 태어난 인간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

 

나의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옷을 갈아 있기 위해서는 현제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로는 불가능하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게 무슨 소리냐?”며 버럭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보면 그들 또한 2천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 나가 여호와 앞에 소와 양을 잡아 열심히 예배를 드렸지만, 그들이 드린 예배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새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았다.

 

현재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율법 아래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똑같은 백성의 신분이라, 아직도 하나님 법아래 살고 있는 죄인들이다. 따라서 백성의 신분(죄인)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죄인들이라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죄인들이다.

 

하나님 백성은 아직 온전치 못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 오실 때까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 이유는, 백성은 아직도 법아래 사는 사람들이라서 하나님 아들이 오셔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비로소 백성의 신분을 벗어나서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 유대인이 되었던 기독교인이 되었든 간에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그들이 온전치 못하다는 증거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죄인)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런 다음 마지막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려준 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고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의 구원 과정이다. 1)유대인의 구원과정: 육체로 오신 예수+성령=온전한 구원

 

예수가 흘려준 피는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해 주었다는 증거로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나 값없이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주신다. 이방인들도 이런 원리로 성령을 먼저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주신 성령은, 구원을 완성시켜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제 막 하나님 백성으로서 삶을 시작하는 이방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더 나아가서 영적인 율법 역할을 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것이다.

 

오늘날 영적인 율법 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죄인)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이스라엘 땅에 육체로 오신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런 다음 마지막에 사도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이방인들 앞에 보내주시는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죄 사함을 받고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구원과정이다. 2)기독교인의 구원과정: 성령+영으로 오신 예수=온전한 구원

 

이스라엘의 예에서 보듯이, 백성의 신분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려도 그런 종교적인 행위로는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것들이라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영생에 들어가려면, 현재 예배당에서 드리는 종교적인 행위로는 머리끝 하나도 희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장차 이방인들 앞에 보내주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어야 비로소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기독교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히브리서의 말씀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첫 언약이 무흠하였다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8:7)”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첫 언약으로 준 율법이 온전한 것이었다면, 둘째 것(그리스도)을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첫 언약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둘째 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히8:13)”

 

히브리서 말씀은,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이다. 불신자로 살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자,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피 흘림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도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 받았다는 증거로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주셨다. 이때 이방인들에게 보내주신 성령은, 그동안 세상 법에 억매여 살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법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영적인 율법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율법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이때부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영적인 율법 또한 온전한 것이 아니고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것들이라, 기독교인들이 날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로는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온전케 될 수 없다. 한마디로 기독교인들의 종교적인 행위는 히브리서8:13절 말씀처럼 “낡아지고 쇠하여질 첫 번째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히10:1절 말씀처럼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이 날마다 드리는 예배 역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 그것은 그리스도의 참 형상이 아니고 모형으로 주신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예배로는 기독교인들이 절대 온전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도구로 사용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켰다. 당시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모세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하다. 모세가 분명히 위대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는 종의 신분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지는 못한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로 쓰임 받는 목사들도 모세처럼 모두 종의 신분이라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지는 못한다. 

 

모세 이후에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구세주로 떠받들고 있다. “우리 조상 모세가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것들이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로 쓰임받는 목사들도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쓰인 사람들을 흠모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심지어 율법의 완성자로 예수가 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보다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자들의 이름만 들먹거릴 뿐, 예수는 거들떠보지도 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그러나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5:38-39)” 크고 화려한 것만을 쫓는 인간의 습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새것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묵은 것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드리고 있는 예배 역시 모두 묵은 것에 속한다. 자신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현재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사역 모두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한 것들이다. 모형을 따라 드리는 예배로는 사람을 절대 변화시키지 못한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려서 자신의 자아가 죽고 새 사람으로 변화 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독교인들 앞에 영적인 아들이 다시 오실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속사람이 변화 된 사람은 없다.

 

기독교인들 앞에 예수가 영으로 다시 오시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속사람을 변화시키기 오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체의 죄를 담당해주러 오셨다. 그러나 영적인 율법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육체의 죄를 사함 받아야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백성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마음속에서 영적으로 지은 죄를 사함 받아야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면 모든 죄가 다 해결될 것으로 믿고 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는 배척하고 모세와 아브라함 이름만 부르고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될 것으로 믿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영적인 백성이 영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고,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이름을 불러서는 마음속으로 지은 영적인 죄를 결코 사함 받을 수 없다. 3)영적인 죄: 마음속으로 성령을 거역한 죄

 

율법을 육체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를 믿어야 율법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아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율법을 마음속에 받은 기독교인들은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영으로 오시는 예수를 믿어야 영적인 율법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아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던 것은, 장차 예수께서 사도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이방인들 앞에 도적같이(아무도 모르게) 가겠다는 것을 미리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들 앞에 예수가 영으로 다시 오신다는 증거는 이삭과 야곱의 예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삭이 이스라엘 땅에 오실 예수를 예표하고 있다면, 야곱은 이방인들 앞에 영으로 오실 예수를 예표하고 있다. 만약 이삭 한사람으로 예수의 예표가 끝났다면 굳이 야곱까지 선택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사기꾼 같은 야곱을 선택한 것은, 이방인들 앞에 보내질 하나님 아들 역시 죄인의 대표가 갈 것을 미리 말해주고 있다. 바울이 예수로 거듭난 후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듯이, 이방인들 앞에 오실 하나님 아들 역시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이 먼저 죄인이 되어야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도 “내가 도적같이 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처럼 영적인 율법아래서 약 2천년 동안 그리스도 모형아래서 그동안 열심히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렸어도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기독교인들도 영적인 율법아래서의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인 모두가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사함 받아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새것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옛것에 취해 있다가 멸망으로 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 또한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붙잡아야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옛것이 좋다하여 거기에 안주하여 끝까지 변화 받기를 싫어한다면 기독교인들 또한 멸망으로 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