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인간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

거친반석 2014. 1. 5. 14:16

본문: 마태복음:11:25-30

제목: 인간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

 

인간은 누구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고 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해보지만 쉽지 않다.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을 번민과 고통 속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감한다. 그러다 생을 마감하면서 모든 짐을 내려놓게 되는데, 죽어서 내려놓는 짐은 인간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인간에게 지어진 무거운 짐이란,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원죄와 인간이 살아가면서 스스로 지은 자범죄이다.

 

불교에서는 해탈(解脫)이라는 것을 통해서 그 짐을 벗어보려 하지만 불가능하다. 무슬림들 또한 죽으면 알라(神)가 그 짐을 벗겨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인간이 죽어서 벗는 짐이라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무거운 짐은 인간이 살아 있을 때 벗어야 한다. 그래야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나가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무거운 짐이 벗겨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려도 그것이 인간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무조건 예배당에 나가 예수 이름으로 예배만 드리면 무거운 짐이 모두 벗겨지는 줄 알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 또한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불러서는 무거운 짐이 벗겨지지 않는다. 기독교인들 또한 무거운 짐을 벗으려면 반드시 이방인들 앞에 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다.

 

이제부터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유대인들을 예로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따라 살도록 명령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따라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죄아래 태어난 인간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따라 살자가 없다. 그 이유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약2:1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부러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를 아래 가두어두기 위해서다. 백성들 모두를 율법을 범한 아래 가두어야 장차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지는 줄 알고 모두가 발버둥을 쳤던 것이다. 법은 지키려하면 할수록 결국 자신의 의(義)만 쌓게 된다.

 

같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나뉘게 된 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세리, 창기들이다. 바리새인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율법대로 살았기 때문에 자신을 의롭다고 하던 자들이고, 세리는 로마 앞잡이가 되어 동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둬들였다 하여 죄인이 된 자들이고, 창기들은 몸을 파는 아주 더러운 죄인들이다.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당시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은 참으로 훌륭한 삶이다. 당시 유대인이라면 그들의 삶을 모두가 흠모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전혀 흠잡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세리와 창기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어긴 더러운 죄인들이다. 율법에 죄인들은 멀리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자신을 의롭다고 하던 자들은, 세리와 창기 같은 자들을 멀리하여 상종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종교적인 생활 아래서는 이것이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영생을 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신앙생활이 도리어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인간이 영생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어야 하고, 아들을 믿기 위해서는 자신이 율법을 거역한 죄인이 되어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신앙생활로는 전혀 흠잡을데 없고 또한 자신을 이미 의롭다고 했기 때문에 그 말을 번복하고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기가 절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시 바리새인들이 짊어지고 있던 가장 무거운 짐이다. 한번 뱉은 말을 번복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정말 율법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피눈물 나는 삶을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시 그들의 삶을 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말씀하셨지만, 정작 예수 앞에 나온 자들은 율법을 거역하여 몸이 병든 자들과 로마의 앞잡이로 살던 세리와 몸을 팔던 창기들뿐이었다. 반대로 자신을 의롭다고 하던 자들은,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할 수 없어서 한 사람도 예수를 찾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종교적인 신앙생활로는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훨씬 더 잘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고 천국에 들어가는 데는 당시 더럽다고 손가락질 받던 죄인들이 훨씬 더 빨리 들어가게 됨을 보게 된다. 이를 볼 때, 성전에서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과 아들을 믿고 영생하는 것은 별개라는 사실을 우리는 저들의 행위를 보면서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이제 기독교인들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율법을 보내주셨다. 영적인 율법이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주신 하나님의 법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육체에 받은 백성이라면, 이방인들은 율법을 마음속에 받은 영적인 백성들이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모두 영적인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만약 영적인 백성들이 마음속에 주신 성령의 법을 따라 살지 못하게 될 경우 마지막 날에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그러나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마음이 부패한 이방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영적인 율법(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을 주신 것은, 기독교인 모두를 영적인 율법아래 가두어두기 위해서다. 기독교인 모두를 성령의 법을 어긴 죄 아래 가두어야 장차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앞에도 영적인 아들을 보내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들로서는 성령만 받으면 모두가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성령을 못 받으면 구원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로 성도들의 구원을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 주신 것들은, 영적인 아들이 올 때까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선물로 주신 은사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영생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크고 많은 은사를 받았어도 그것이 곧 온전한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은사란? 예수의 부분적인 것들을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미리 맛보라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들이다. 그래서 고전12장에서도 성령을 주심은 각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성령이 그리스도 영으로서 ‘구원의 영’이라면 바울은 ‘유익’이라는 말 대신 ‘구원’이라는 말을 써야 했을 것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고전13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이루어질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9,10)” 이는 곧 영적인 아들이 기독교인들 앞에 오시게 되면 이런 은사들이 모두 폐하여지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은사가 폐하게 되면 종교적인 신앙생활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 이유는,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이 모형아래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모두가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짊어진 가장 무거운 짐이다. 아직도 죄아래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모두 구원 받았다고 한다면 이 사람들은 절대로 영으로 오시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의롭다고 한말을 번복하고 예수 믿기가 쉽지 않았듯이, 기독교인들 또한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말을 번복하고 영으로 오신 예수를 믿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는 거짓의 아비 마귀가 진리가 아닌 것을 사실로 믿고 받아들일 때, 마귀는 인간들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서 절대 놓아주지 않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기독교인들 말대로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라면,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어떤 걱정이나 근심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예배당에서 드리고 있던 모든 예배도 당장 중단해야 한다. 예배를 통해 그토록 고대하던 천국이 자기 마음속에서 이루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아직도 예배를 드리고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천국이 마음속에서 이루어졌는데 왜 온갖 세상 걱정을 하며 날마다 불안 초조에 떨어야 하는가?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도 근심걱정을 하는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처음에는 잠깐 동안 눈이라도 빼줄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하나 같이 모두 옛 구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라면 기독교인들에게서 절대 이런 현상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령은 이방인들에게 영적인 율법을 주러 오셨기 때문에 성령 아래서는 얼마든지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으로 갈 수 있다.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으로 가도 성령은 법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지 않는다. 단, 법을 어긴 자들을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우신다. 하지만 그리스도 영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는 절대 타락으로 가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영으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생하기 싫은 사람들은 굳이 영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를 다시 믿지 않아도 된다. 아들을 믿지 않고도 얼마든지 종교적인 신앙생활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하기 위해서 아들을 믿는 것과 달리 종교적인 신앙생활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교회문턱만 밟고 왔다 갔다 해도 된다는 말이다. 영생하는 것과 종교적인 신앙생활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

 

인간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영으로 오시는 예수를 믿을 수 있다. 영으로 오시는 예수를 믿어야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된다. 성경에 등장하는 부자청년이 그토록 열심히 계명을 다 지키고도 영생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영생을 포기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율법 아래서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과 영생하기 위해서 아들을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임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날마다 전전긍긍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날마다 불안에 떨고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행위로는 인간의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 못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누차 강조하고 있다. 믿는 하나님 백성들이 율법의 무거운 짐을 벗고 영생에 들어가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아들을 믿어야만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늘날 부자는 많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날마다 근식 걱정을 하고 있고, 유식한자는 유식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고, 탤런트나 가수는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날마다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권력을 잡은 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불안에 떨고 있다. 그런가하면 명예로 높아진 자는 자신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목숨을 건 사투를 벌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짊어진 가장 무거운 짐이다. 인간은 이렇게 누구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흙에서 태어난 인간이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는 이런 것들이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런 것들을 붙잡으려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앞날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불안은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죄악에서 시작된다. 그 죄악을 제거하지 않는 한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세상 것을 붙잡으려고 발버둥 친다. 이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불안을 해소하고 모든 근심과 걱정,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영으로 오시는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길뿐이다. 유대인의 종교적인 신앙생활이 유대인들을 거듭나게 하지 못했듯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앙생활 역시 종교적인 행위로는 절대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방인들 앞에 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어야만 가능하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