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8:1-13
제목: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모형으로 첫 번째 것을 주시고, 마지막에 온전한 것을 주신다. 하물며 인간들도 본 경기를 하기에 앞서서 먼저 충분한 연습을 한 후에 마지막에 본 경기를 펼친다. 비유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인간들 모두가 죄악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법을 먼저 주신 후에 마지막에 온전한 것을 주신다. 그 예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율법을 먼저 주신 후에 마지막에 복음을 주셨다. 이런 원리는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기독교인들 모두가 현제 성령의 법아래서 예수 이름으로 드리고 있는 예배 역시,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기독교인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현재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으로 드리고 있는 예배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성경이 말하는 첫 번째 것(율법)에 해당된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이런 말을 듣고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아직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법아래 갇힌 죄인들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제 곧 하나님께서 그 두 번째 것(영적인 아들)을 기독교인들 앞에도 보내주시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두 번째로 오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어야 비로소 온전케 될 수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우리네 속담처럼, 남의 것은 잘 보이는데 정작 자신의 것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를 직역하면, 오늘날 기독교인들 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과 복음은 잘 보이는데, 정작 자신들에게 주신 율법과 복음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영적인 소경이요 어둠속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루살렘 성전에 나가서 짐승을 잡아 하나님 앞에 드리던 제사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자신들이 드리고 있는 예배가 장차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법아래 살 때는 그 법이 꼭 자신을 구원할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을 가지고 마친 천국백성이나 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땅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아직도 죄를 벗지 못한 사람들이다. 설사, 땅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청함을 받았다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믿어야 율법(영적인 율법)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은 후, 아들로부터 택함을 입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아래 살 때는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살았다. 그들은 적어도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한번도 복음이라는 것을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어디를 봐도 복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곳은 없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메시아가 와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앞에 막상 예수가 오셨지만, 그들은 예수를 죄인의 친구 혹은 이단괴수라 하여 믿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을 모두 죄 아래 가둔 다음,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주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그런 은혜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일부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했던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지만, 그들 역시 율법아래 사는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 아래 사는 사람들로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폐단이 생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부패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영적인 율법을 주신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율법(성령의 법)을 통해서 기독교인들 모두를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다. 기독교인들을 죄 아래 가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보내서 성령의 법을 거역한 죄에서 그들을 구원해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모두가 성령(영적인 율법)으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독교인들 역시 아직은 모두가 성령의 법을 거역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자신들은 예수를 믿었으니까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구원에 이른 것처럼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이는 어느 교회, 어느 교단을 가더라도 모두가 성령을 그리스도 영과 동일시하여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은 기독교인들에게 법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성령으로는 결코 기독교인들이 절대 거듭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고 해결을 받았던 것은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원죄를 사함 받은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인들이 원죄를 사함 받았다하여 곧장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피로 말미암아 원죄를 해결 받은 기독교인들은 이제 겨우 땅에서 하나님 백성이 된 것에 불과하다. 원죄를 해결 받은 하나님 백성은 자신이 지은 자범 죄도 해결 받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원죄를 사함 받아 땅에서 하나님 백성이 된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모두가 마음이 부패하여 성령을 따라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인들 모두가 자동적으로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죄 아래 묶어두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죄 아래 가둔 목적은, 그들 앞에 영적인 아들을 보내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죄에서 구원받는 과정이다.
아직도 법(죄)아래 살고 있는 백성으로서는 하나님 법만 지키며 그것으로 온전케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고, 다만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누차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남의 잘못은 크게 보면서도 정작 자신의 잘못은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영적인 소경이란 바로 이런 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약성경이 첫 것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성경을 완성시켜주셨다. 그것을 기록한 말씀이 바로 신약성경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약성경이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말씀이다. 따라서 앞으로 영적인 그리스도가 이방인들 앞에 오셔서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완성시켜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는 영적인 복음이다. 그리고 영적인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기독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지침서가 될 것이다.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8:7)” 히브리서 저자가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논리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된 사상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기록한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첫 것에 안주하여 구원받았다고 하고 있었으니 같은 형제로서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그런 사실을 예수를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된 히브리서 저자는, 자기 형제 동포들이 잘못된 논리에 빠져 멸망으로 가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다시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9)” 그가 첫 것을 왜 폐해야 하며 그리고 왜 둘째 것이 필요한가를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히브리서 저자가 자기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의 마음이다. 히브리서 저자 역시 처음에는 그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보니 비로소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첫 것에 안주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깨닫지 못하면 바리새인들이 갔던 길을 걷게 된다.
바울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인으로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였으나, 그가 다메섹 도상으로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완전히 변하여, 이방인들에게 아주 구구절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기록한 말씀 중에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9-10)” 위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으로, 성령의 은사로 주신 것들이 첫 것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바울이 기록한 위 말씀이 바로 두 번째 것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성경에는 모두 짝이 있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짝이란, 모형과 실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예로 구약과 신약이 짝이 되고, 율법과 복음이 짝이 되며, 이삭과 예수가 짝이 되며, 야곱과 영적인 그리스도가 짝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구약은 첫 언약이요 신약은 새 언약이다. 또한 율법이 첫 것이라면 복음이 둘째 것에 해당되고, 그리고 이삭이 첫 번째 주신 모형이이라면 예수가 온전한 둘째 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야곱은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실 첫 것에 해당되며, 사람을 통해서 영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그 두 번째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바로 사람을 통해서 두 번째 오시는 영적인 그리스도를 믿어야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모형으로 주신 첫 것 아래서 살게 하신 다음, 그것을 폐하신 후 마지막에 온전한 둘째 것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현제 첫 것 아래서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로서는 마지막에 오실 둘째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러다보니 모형으로 주신 첫 것을 실제 구원으로 믿고, 자꾸만 그 안에 안주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첫 것으로 주신 율법이 전부인줄 알았다가 둘째 것으로 보내주신 아들을 믿지 못해서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첫 것으로 주신 성령의 법을 구원의 전부로 알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가고 있다. 기독교인들 앞에는 아직 둘째 것을 보내주신 적이 없다. 따라서 현제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구도 온전한 구원에 들어 간자가 없다. 이제 곧 둘째 것을 보내주실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인내로 둘째 것을 기다려야 한다.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첫 것으로 주신 모형아래서 살 때는, 둘째 것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첫 것으로 주신 것을 온전한 것이라 믿고 그 안에서 자꾸만 안주하려고 한다. 가령,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것이 자신들을 온전케 하는 법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어느 누구의 말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이 받게 되자 그로 인해서 자신이 죄에서 구원 받게 되었다며 기뻐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느끼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역시 현제는 모두가 모형으로 주신 첫 것 아래 머물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 것 아래 머물러 있다는 말은 아직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다.
아직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둘째 것으로 보내주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어야 비로소 죄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죄에서 자유케 된 자가 아들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자꾸만 사도 바울을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아직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 기독교인들이 바울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려면 바울처럼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현재 기독교인들은 성령만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비로소 바울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바울과 같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법도 없이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이제 겨우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받았는데, 그것을 가지고 바울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착각하고 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죄가 남아 있으면 안 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여전히 죄악이 가득하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죄악이 가득하다는 말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물”로 비유되는 그리스도가 없다는 증거다. 이것만 보더라도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거듭난데 비해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가 없이 성령만 받아갖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바울처럼 되려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앞에 보내주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첫 것으로 주신 모형아래서 살다가 두 번째 것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고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인들이 이런 말을 귀담아 들을지는 미지수다. 바울이나, 히브리서 저자가 자기 민족들을 생각하여 애타는 마음으로 말씀을 기록했지만,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모형으로 주신 첫 것에 빠져 사도들이 전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안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모두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주신 첫 것에 빠져, 두 번째 영적인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 또한 귀담아 듣지 않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성경에서 말씀하신대로 “첫 것으로 주신 것(영적인 율법)들을 모두 폐하고, 둘째 것(영적인 그리스도)으로 주신 것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게 될 것이다(히10:9)”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
TIP: 그동안 하나님도 모르고 개, 돼지처럼 살던자가 우여곡절 끝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의 법아래서 일곱해를 살았다. 그러던 중 또 다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번에는 빛(영)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내마음속에 들어오시니 비로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죄악속에 살던 내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주님을 만나고 보니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성령아래서 살때는 내가 의인이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줄 알았지만, 영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내가 죄인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보니, 그동안 성령 아래서 내가 얼마나 자기 의와 자기 명예를 쌓고 있었는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난 후 자신을 죄인중에 괴수라고 했던 말이 구구절절 이해가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알려주신 진리는, 의인은 마음이 높은 곳에 있지만, 죄인은 마음이 낮은 곳에 있다고 말씀 하신다. 따라서 주님은 마음이 낮은 곳에 있는 자를 찾아오신다고 말씀하신다.
현제 주님의 심정으로 기독교인들을 바라볼 때, 이방 형제들이 유대인들처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체 너무도 잘못된 길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어도 귀를 닫고 듣지 않는다. 그것을 바라보기가 너무도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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