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부딪히는 돌과 거친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거친반석 2014. 1. 5. 14:34

본문: 로마서9:30-33

제목: 부딪히는 돌과 거친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하나님의 법도 없이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인들은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데 반해서 2천년 동안 예수의 모형으로 주신 성전 앞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열심히 제사를 드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작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바울의 심정은 찢어질 듯 아프다. 그들이 왜 예수를 믿지 못하는지 바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바울도 한때는 그들처럼 예수를 핍박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2천년 동안 그리스도 모형으로 주신 예배당에 나아가 온갖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역시 그들 앞에 영적인 그리스도가 오신다면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그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인 모두가 성령(율법)으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기독교인 중에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로 거듭 난자가 있다면, 자기 동족들이 마귀에게 속아 잘못된 길에 들어서 있다는 사실에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이 예수를 믿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의의 법을 좇다가 그렇게 되었다(롬9:31)”고 말한다. “의의 법이란” 율법을 가리키는 말로서,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바울의 이 말을 마음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기독교인들 역시 현재 모두가 성령의 법으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법은 죄를 깨닫게 할뿐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넘어짐을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해서 그렇다(롬9:32)”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는 것을 말하며, “행위란” 마음도 없이 입술로만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를 두고 바울은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부딪힐 돌이란” 예수를 두고 하는 말로서, 유대인들 모두가 율법으로 의롭게 된 줄 알고 있었는데, 예수가 오시자 사사건건 부딪히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실지로 예수와 바리새인들 간에 언쟁은 그칠 날이 없었다.

 

바울은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며,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뿐 아니라,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롬9:33)”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부딪히는 돌과 거친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이론으로 알고 있는 것과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내안에 모시고 있는 것은 하늘과 땅처럼이나 많은 차이가 난다.

 

첫 번째 “부딪히는 돌”은, 이스라엘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실지로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는 자신을 의롭다고 하던 바리새인들과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자주 부딪혔다는 말은 그들의 마음이 그만큼 높아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음이 높아졌다는 말은 마귀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과는 반대로 자신을 죄인으로 낮춘 세리와 창기, 그리고 율법을 어겨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몸에 문둥병이 생긴 자들은 예수 앞에 달려 나와서 살길을 찾았다.

 

두 번째 “거친 반석”이란, 이방인들 앞에 영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거친 반석”은, 말 그대로 다듬지 않은 돌이라 매우 거칠다는 뜻이다. 거친 반석으로 오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기고 있던 죄악들을 들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 마음속에 비수를 꽃아 넣게 될 것이다. 그때, 거친 반석으로 오신 주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는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 나올 것이나,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마귀 앞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이로서 알곡과 쭉정이가 정확히 나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거친 말씀을 가지고 이방인들 앞에 오셨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까지 교회에서 구원받았다며 목사들로부터 좋은 소리만 듣고 신앙생활 했던 사람들이 주님께서 예리하고 날선 검으로 인간의 아픈 곳을 찔렀을 때, 과연 기독교인들이 그 말씀을 듣기 좋아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성령으로 거듭났다며 거룩함에 젖어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죄악을 들추어내는 “거친 반석”이 전하는 말씀을 주님 말씀으로 듣겠냐는 것이다. 십중팔구는 욕하고 돌아설 것이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처럼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는 자나 또는 성령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저주로 마음이 황폐케 된 자는 “거친 반석”을 찾아 나올 것이다.

 

이삭의 예표로 이스라엘 땅에 오셨던 예수는 이삭처럼 순종의 종으로 오셨지만, 야곱의 예표로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는 야곱처럼 천사와 씨름하여 이길 만큼 심지가 굳고, 에서와 맞설 만큼 거친 성격의 소유자를 통해서 오실 것을 예고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런 자를 통해서 오시는 것은 이방인들 모두가 사납기 때문이다. 돌처럼 굳어 있는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을 들추어내기 위해서는, 그들 마음속에 예리하고도 날카로운 주님말씀을 쏟아 부어서 숨어 있는 죄악들을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그래야 이방인들 모두가 자신의 죄악을 보고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죄를 실토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사실 예수 이름만 부르고 있는 것이지 실지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실지로 믿으려면, 하늘에 오르신 예수가 영으로 기독교인들 앞에 오셔야 한다. 그때 예수가 영으로 오실 수 없기에 바울처럼 사람을 통해서 오시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오시는 분을 믿어야 진짜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법아래 사는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다.

 

만약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시는 예수로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이방인들의 구원까지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 같았으면, 하나님은 이삭 한사람만 성경에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의 후손으로 야곱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땅에 오셨던 예수가, 이방인들 앞에는 영으로 오실 것을 예고하고 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가 아버지의 영광을 입어 영적인 분이 되셨고, 영으로 계신 예수가 인간들 앞에 그대로 오실 수 없기에 이방인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그를 통해서 오시는 것이다. 바울 속에 예수께서 빛으로 들어가셨던 것처럼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예수 역시 그렇게 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장차 되어질 일들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아무 의미 없이 기록한 글이 단 한 가지도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이스마엘이 버림을 당하고 이삭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약속의 자녀가 되었고, 이삭의 후손으로 에서와 야곱이 있었으나, 에서가 버림을 당하고, 야곱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았다. 여기서 버림을 당한 이스마엘 족속은 예수를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버림을 당한 에서족속 역시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버림당할 기독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말이다.

 

성령의 법아래 사는 기독교인들로서는 이런 말을 처음 듣기 때문에 누구도 이를 인정하려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유 없이 기록한 말씀이 단 한 말씀도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기독교인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섣불리 판단하여 함부로 잣대질 하는 우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아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품속에서 나오신 아들 한분뿐이다. 따라서 죄 아래 사는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율법)이 아닌 그리스도 영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양자의 영으로 오신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현재 성령의 법(율법)아래서 사는 죄인들이다.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 누구도 온전한 구원에 들어갈 수 없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그것을 기독인들에게 똑똑히 잘 보여줬다. 예수를 믿지 않던 유대인들의 멸망을 보고도 기독교인들이 똑같은 길을 걸어가겠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예배당에 서 열심히 예배 드렸던 것은 모두 장차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예배 드렸던 것이다. 이제 그것을 이룰 날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런데 자신의 고정관념을 내려놓지 못해서 또 다시 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까지 죽어라고 예배드린 일들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바울은 바리새파 출신으로 자신을 의롭게 여기던 자였지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 회심한 후에는 그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그가 다른 사도들에 비해서 율법과 복음을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바로 율법아래서 의로운 생활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율법아래서 살 때 느낀 것은, 얼마나 자기 의(義)만 쌓고 하나님 앞에 죽을 짓만 하고 있었던가를 구구절절 깨달았기 때문에 그것을 성경에 기록했던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사는 기독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심정을 깨달으려면, 적어도 이방인들 앞에 영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고 거듭나야 그 심정을 깨달을 수 있다. 현재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 율법아래서 살던 때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바울과 같은 자가 되려면 반드시 성령이 아닌, 그리스도 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바울과 같은 자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성령을 그리스도 영과 하나로 보기 때문에, 모두가 성령만 받으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으로 착각하지만, 아무런 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이 이제 겨우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율법을 받은 것을 가지고 모두가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말은, 죄로 말미암아 나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 영으로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깨닫게 할뿐, 인간들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둠속에 살던 인간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밝은 빛을 받게 되자 그것을 거듭난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은 양자의 영을 받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들의 아버지로 오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은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일은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일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분뿐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주인이란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영으로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나의 주인이 되어 주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죽은 영”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현재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도 여전히“죽은 영”이 기독교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죽은 영”은 인간의 죄악을 먹고 산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마음속으로 죄를 지을 때마다 “죽은 영”은 그들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예수를 “산 영”이라 말할 때,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영을 “죽은 영” 혹은 “악한 영” 또는“세상 영”이라 부른다. 모든 인간 속에는 바로 이런 더러운 영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성령 충만함을 받아도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죽은 영”의 지시를 받아 믿는 자들이라도 세상 것에 욕심을 내고 탐을 내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점점 더 타락으로 가는 이유도 모두 이런 “죽은 영”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죽은 영”을 인간의 마음속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서 죄악을 털어내야 하는데, 우리가 일반 교회에서 통상적으로 하는 회개는, 인간이 일상적으로 지은 죄만 갖고 하는 회개라서 마음속의 죄가 다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죄악을 모두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빛을 비추어주셔야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비춰주신 빛을 통해서 깨달은 죄를 들고 그리스도 앞에서 회개하게 되면, 그리스도는 죄를 사해주는 권세가 있기 때문에 죄악과 더불어 죽은 영도 떠나게 된다. 그런 후에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주인으로 좌정하시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영을 받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아무리 회개를 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에게는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세가 없기 때문에 죄도 다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은 영”도 떠나지 않는다. “죽은 영”도 영물이라 상대방이 진짜 그리스도 영을 받은 사람인지 가짜 그리스도 영을 받은 사람인지 금방 알아보고 꿈쩍도 않는 것이다. 귀신이 사람들보다 예수를 더 빨리 알아보고 “왜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우리를 괴롭히려 왔느냐”고 했던 말이 바로 두고 하는 말이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그들이 기독교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령의 은사로 말씀을 전하는 것은 땅에서 불신자들을 예수 믿게 하여 하나님 백성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령의 은사로 주신 것들은 그리스도의 부분적인 것들을 주신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성령의 은사로는 결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영” 또한 몰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성령의 법아래서 살 때는 육신의 소욕을 절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 수밖에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갈수록 점점 더 타락해 가는 것도 모두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도 예수가 오실 무렵에는 모두들 타락하여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게 되면,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다. 성령은 율법을 주러 오셨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지 않아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 수 있지만, 그리스도는 인간의 주인으로 오시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여 절대로 인간 뜻대로 살 수 없게 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각각 다른 점이다.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오늘 말씀을 읽고 이해가 되었다면, 이제부터라도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고정관념을 버리고 “거친 반석”으로 오시는 영적인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서 기름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미련한 다섯 처녀들처럼 신랑이 왔을 때 미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서 졸다가 버림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