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말씀
본문: 요한복음10:1-6
제목: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성경에 양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양의 비유를 들어 믿는 자의 행동을 설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양의 비유를 들어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한다”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양은 주인의 음성을 듣고 주인이 앞서가면 양들도 주인의 뒤를 따라 간다고 한다. 그러나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양을 부르게 되면 양들이 꼼짝도 않을뿐더러 도리어 도망친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원래 유목민 출신들이라 양을 치는 자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들의 현실을 감안하여 양의 비유를 들어 자신과 유대인의 관계를 설명하시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럼 예수님과 양의 관계를 살펴보며, 과연 나는 현재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본문 27절에서 말씀하신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하신 말씀대로라면, 적어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라면 양들처럼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 이름을 부르며 신앙생활 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과연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 뜻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살기 보다는 자기 뜻대로 사는 자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없다. 성경말씀대로라면 분명히 예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따른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면 보통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왜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살지 못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모든 죄를 다 사해주셨으니까 교회만 열심히 다니면, 죽은 후에는 모두가 천국에 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인들의 바람일 뿐 성경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2천년 동안 율법아래서 죽도록 신앙생활 하였지만, 열심 낸 그 것으로 그들 역시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의 법아래서 죽도록 열심히 신앙생활 한 그 것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 역시 마음속의 죄악을 털어버리기 전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생전에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해결 받지 못하고 죽게 되면, 아무리 살았을 때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어도 죄악의 몸이 부활하여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거친 후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된다. 마태복음22장에 나오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둠속에 내어 던지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였으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정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죄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의 적용을 받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며 사는 자가 없다. 인간은 모두 죄악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 모두를 율법아래 가두어 두기 위해서다. 그래야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도 나도 율법을 지켜서 거룩하게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율법을 지켜서 거룩하게 되려고 하며 할수록 도리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율법은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거룩하게 되었다며, 율법을 거역한 자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를 배척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 현재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역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육체로 지켜야 할 “율법”을 주셨다면, 오늘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마음속으로 지켜야 할 “영적인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체에 율법을 받고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죄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을 통하여 마음속에다 “영적인 율법”을 받았다. 하지만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영적인 율법”을 쫓아 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다 “영적인 율법”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기독교인 모두를 “영적인 율법(성령의 법)” 아래 가두어 놓기 위해서다. 그래야 기독교 2천년 역사 마지막에 부활하신 예수를 보내서 기독교인들을 영적인 죄(영적인 율법)에서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기독교인들로서는 바리새인들처럼 계속해서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소리만 하고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거역하고도 자신이 율법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을 거역하고도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율법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자신이 성령(영적인 율법)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되면, 아무리 부활하신 예수가 다시 오신다 해도 기독교인들 역시 부활하신 예수를 믿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인들 역시 지금까지 죽도록 신앙생활 하고도 자신의 의(義) 때문에 결국은 부활하신 예수를 믿지 못하여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게 될 것이다.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법(영적인 율법)”을 쫓아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악” 때문이다. 이 죄악을 영적으로 표현하면 “죽은 영”이다. 우리가 예수를 “산 영”이라 표현할 때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영을 “죽은 영”으로 표현한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고도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죽은 영”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끝에 가서 모두가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 또한 모두가 “죽은 영”이 방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 이방인 중에서 한 사람을 통해서 영으로 다시 오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마음속의 죄(성령을 거역한 죄)를 해결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 했더라도 그리고 교회에서 많은 감투와 높은 지위에 있는 자라도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시하여 성령을 받으면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성령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 말대로 성령이 그리스도 영이라면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말인데 왜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일까? 이건 논리적으로 따져 보아도 너무도 앞뒤가 안 맞는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전혀 앞뒤가 안 맞는데도 기독교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만 잘하면 무조건 천국에 갈 것으로 믿고 있다. 이는 마치, 바리새인들이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것으로 거룩하게 되려고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성경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너를 삼키리라!”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아직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가 열심을 내면 낼수록 도리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인간을 지배하던 “악한 영”이 열심을 낸 그것을 믿음으로 둔갑시켜서 믿는 자들을 구원 받았다고 속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고도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죽은 영(죄악)” 때문이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죽은 영”을 쫓아내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성령의 뜻대로 살 수 없을뿐더러,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도 살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죽은 영”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땅에 육체로 오신 예수 이름을 불러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흘려주실 때 피로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는 내 마음속에 들어 오실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는 “죽은 영”이 물러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로도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죽은 영”이 물러가지 않는 이유는,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는 아담이 지은 “원죄”만 해결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죽은 영”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예수 이름만 불러서는 안 되고, 반드시 부활하신 예수께서 영으로 내 마음속에 직접 들어오셔서 “죽은 영”을 쫓아내 주셔야 한다. 그래야 “죽은 영”이 떠나고 나도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런 자가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다.
이런 원리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영적인 율법”을 마음속에다 받은 이방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를 통하여 아담이 지은 “원죄”는 해결 받았기 때문에, 이제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예수께서 영으로 믿는 자의 마음속에 직접 들어가서 “죽은 영(죄악)”을 몰아내고 예수께서 인간의 주인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믿는 자의 마음속에 좌정하여 계실 때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성령의 뜻대로 살게 되며, 더 나아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게 된다. 이런 자들을 두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일컫는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성찬식 때마다 먹었던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속에 부활하신 예수가 계신 자는 다시는 그리스도 모형에 불과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모신 자는 다시는 성찬식 같은 기독교 전통을 따를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전통에 억매여 있는 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런 전통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예수를 만나지 못한 자들은 계속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나가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지만, 예수를 만난 자들은 더 이상 그런 전통과 율법에 억매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배제하고 무조건 성령 받았으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으로 생각하여 자기 뜻대로 살면 마지막 날 죄악의 몸으로 부활하여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이제 왜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게 되었으며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살지 못하는지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이렇게 자세히 설명을 해줘도 마음속에 사단이 가득한 자들은 이런 말을 절대 귀담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상실한 마음대로 그냥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부디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활하여 영으로 다시 오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마지막 날 버림받지 않기 때문이다. -귀 있는 자는 부활하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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