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거친반석 2020. 9. 27. 07:54

그리스도의 주일 말씀

본문: 누가복음10:25-37

제목: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본문 말씀을 보고, 강도 만난 이웃을 도와준 사마리아인을 보고 선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본문을 보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을 선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죄악 속에서 태어난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1도 나올 수 없다. 더군다나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다. 다시 말해 율법아래 태어난 유대인과 달리 이방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악을 마음속에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라서, 선한 것이 1도 나올 수 없다.

 

그런데 강도 만난 이웃을 도와주었다고 하여 인간을 선하다고 표현한다면, 오늘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준 이방인들은 모두 선한 사람들로 불러져야 될 것이다. 물론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 것이 선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선함이란?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하나도 없는 것을 두고 ‘선’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자기 마음속에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 중에서 죄가 하나도 없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분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선하게 되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속에 계셔야만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조금만 착한 일을 하고 나면 그것을 선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선한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생각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코자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고 묻는다. 그러자 율법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 말을 들은 예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하고 물으면서, 오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예수께서는 세 사람을 등장시켜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신다. 세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제사장이요 또한 사람은 레위 인이요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다. 세 사람 앞에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을 벌거 벗긴 체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지 거의 죽게 생긴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제사장이 그리로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았으나, 그를 피하여 다른 길로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한 레위인도 그리로 지나가다가 강단 만난 자를 보고, 그도 다른 길로 피해 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마리아인이 그 길로 여행 하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아 주리라 하는 것이다. 사마리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율법의 저촉을 받지 않는 이방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율법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예수께서 묻기를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하고 묻자, 율법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과연 예수의 이 말을 들은 율법사가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줄 수 있을까? 율법사는 절대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줄 수 없다. 그 이유는 율법사에게는 율법이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기 전에는 절대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율법사는 강도 만난 자를 절대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율법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율법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면, 그때는 율법사도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율법의 저촉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도 얼마든지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줄 수 있다. 결국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너도 예수 믿고 새롭게 되라는 뜻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제사장이나 레위 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줄 수 없었던 것은, 제사장은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만지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레위인 역시 마찬가지로 성전에서 제사장들을 도와 성물을 만지는 사람들이라,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레위인도 어쩔 수 없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피해서 다른 길로 갔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라 율법의 저촉을 받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줄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사마리아인이 선해서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사마리아인의 흉내를 내서 무조건 자신들도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준 것을 가지고, 자신들 또한 이웃사랑을 실천했다며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웃사랑은 불신자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다. 육신적으로 이웃을 돕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선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이웃사랑은 될 수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이웃사랑은 나를 아무조건 없이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라면, 육적인 이웃사랑이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적인 이웃사랑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영적인 이웃사랑이란? 나의 목숨을 상대방에게 아무조건 없이 그냥 내어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웃사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그리고 이어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39-44) 말씀하시고 있다. 위 말씀은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라면 반드시 실천하고 지켜야될 말씀이다. 위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면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성령을 거역한 죄아래 갇히고 말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위와 같은 말씀들을 모두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이웃사랑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인들 중에 위와 같은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한명이라도 있을까?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왜 실천하지 못하는가? 아직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미움, 시기, 질투, 분노, 음욕, 탐욕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살면서도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런 죄악들을 마음속에 품고 살면서 기독교인들이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아주었다고 해서 그들을 선하다고 여기면 어찌되겠는가? 기독교인들은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들을 해결 받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전한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온전한 사랑을 전혀 실천할 수 없단 말인가? 기독교인들에게도 방법은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면 가능하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면, 죄악을 먹고 마시던 나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그때는 어떤 댓가도 받지 않고 나를 상대방에게 기꺼이 내어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온전한 사랑을 펼칠 때 상대방 속에 들어 있던 악한 영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 앞에서 힘을 잃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이웃사랑이요.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런데 자기 가족 하나도 따뜻한 마음으로 품지 못하면서, 노숙인들에게 밥을 먹여 주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가 봉사 하는 것을 두고 이웃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다. 이런 봉사는 모두가 댓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이웃사랑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이웃사랑은 자기 가족부터 아무런 댓가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아내는 남편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하고, 남편 또한 아내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이웃사랑이다. 만약 어떤 일을 하고 나서 그것에 대하여 단 1프로라도 댓가를 바라거나,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진정한 이웃사랑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웃사랑에 대한 것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셨다. 죄악 속에 살고 있던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죄없는 몸으로 오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기꺼이 죽어주셨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 또한 예수와 같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 하신 사랑을 실천하려고 보니까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죄악이 가득하여, 어떤 일을 하고 나서는 반드시 거기에 대한 댓가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다. 결국 기독교인들로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자는 자신은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고 선행을 베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자는 자기 자신에게 철저히 속고 있는 자이다. 그리스도 이외에 그 어떤 자도 인간은 댓가를 바라게 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시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인들 앞에 다시 오셨다. 현제 성령을 거역하여 죄 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속의 죄를 해결 받고 진정한 이웃사랑을 펼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면, 댓가를 바라고 하던 나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가 새로운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얼마든지 자신도 그리스도의 댓가 없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이웃사랑이요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이다. -귀 있는 자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