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주일 말씀
본문: 요한복음4:1-26
제목: 하나님은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요한복음 4:23-26).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그럼 어떻게 예배 드리는 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가? 한마디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그러나 죄 아래 태어난 이방인들로서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죄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마음을 다해서 예배 드리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은 우선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아야 한다. 죄를 해결 받지 않고는 누구도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기독교인 스스로는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예배는 다 무엇인가? 그것은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 모형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마음도 없이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기독교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겠지만, 기독교인들이 온전한 예배를 드릴 것 같았으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 2천 년 역사 마지막에 그리스도가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인격적으로 다시 오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받아 주시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 마음이 부패하여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주고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합당해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 모형 아래서 드리는 예배라서 받아 주시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합당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아주셨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고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모르고 신앙 생활하게 되면 기독교인들의 구원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를 모르고 예배 드리는 자는 마치, 구구단을 모르는 학생이 곱셈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과 같다. 곱셈 문제를 풀려면 구구단을 먼저 알아야 하듯이, 기독교인들이 온전한 구원에 이르려면 예배 드리는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를 알지 못하면 구원의 문제는 절대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고 믿겠지만,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믿은 것으로는 아담이 지은 '원죄' 하나만 해결 되었을 뿐, 아직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는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불러서는 해결이 되지 않고, 오직 이방인들 앞에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해결 받을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고 있는 이유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내 달라는 의미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성령의 뜻(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신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지은 죄를 해결해 주셔야 비로소 영생에 이를 수 있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처음 듣는 이런 말이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계시록에 어린 양이 와서 인(印)을 떼지 않으면 누구도 성경의 비밀을 알 수 없다고 하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기독교인 누구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 역시 아직은 '영적인 소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소경이란?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라고 말했던 것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전혀 보지 못하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우쭐 됐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죄 아래 사는 교인들로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두 백성 모두가 율법(영적인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한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성령을 받으면 무조건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성령은 그리스도 영이 아니라 하나님 영으로서 인간의 육체를 입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속에 오고 싶어도 오실 수가 없다. 따라서 성령은 인간의 머리 위에 임하여 기독교인들의 영(靈)만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기독교인들에게는 '영적인 율법' 역할도 하신다.
성령이 인간의 마음속에 오실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아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으려면 사도 바울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직접 들어오셔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인들 마음속에서 죄를 짓게 하는 '죽은 영'이 떠나고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주신다.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주셔야 기독교인들도 비로소 바울처럼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
예수가 육체로 계실 때는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는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속에 오신다는 말은, 기독교인들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라 생소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오셔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베 드릴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맨 처음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갔던 일은,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던 사건이다.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를 돌로 처 죽이던 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던 것은 바울이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장차 이방인들 앞에 다시 가실 때, 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다시 가겠다는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와 달리 만약 성령이 인간의 마음속에 오시게 되면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인간은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좋은 예로 벧세메스 사람들이 블레셋에 빼았겼던 하나님의 법궤가 소 달구지에 실려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쁜 나머지 그 법궤를 들여다보고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죄인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과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도 죽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진짜 하나님을 대면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을 대리한 천사들을 만났기 때문에 죽지 않았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성령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자가 한 명도 없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성령을 받으면 무조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공중에 재림하실 예수만 알고 있을 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바울 같은 자를 통해 이 땅에 먼저 오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죄 아래 사는 자들의 현실이다. 따라서 천국의 비밀은 오직 하나님 품속에서 나오신 아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려면 사도행전 9장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부활하신 예수가 영으로 바울 마음속에 직접 들어가신 것이다. 예수가 바울 마음속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바울 마음속에 있던 죄악(죽은 영)이 모두 사라졌다는 말이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가 살아 계실 때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지만,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가 자기 마음속에 들어오신 후에야 죄 사함을 받고 온전케 된 자이다.
바울은 그 후 예수의 지시에 따라 다메섹으로 내려가 아니니아의 안수를 받고 성령을 받게 되었다. 성령을 받는 방법은, 성령을 받은 자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을 받을 수 있다. 이방인이라도 성령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로 세상 임금인 마귀를 멸해 놓았기 때문에, 누구나 예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성령은 쉽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은 인간의 마음속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머리 위에 임하여 인간의 영(靈)만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오시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말씀 자체가 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하시는 말씀을 믿게 되면,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씨가 심어지게 된다. 마음속에 심어진 그리스도의 씨는 점점 자라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야 비로소 바울처럼 인간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를 설명하는 내용이 바로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이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로서 자라거나 성장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자라거나 성장한다고 하면 어찌 되겠는가?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바울이 기독교인들과 다른 점은, 바울은 자기 마음속에 부활하신 예수도 계시고, 성령도 받은 자이지만, 기독교인들은 성령 하나만 받았을 뿐 아직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가 대신 죄악이 가득하다. 따라서 겉으로 보면 바울과 비슷해 보이지만 속은 완전히 다르다. 바울이 인간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 마음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을 전도하여 하나님 백성 만드는 일을 할 뿐, 인간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처음 성령을 받으면 눈이라도 빼줄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만다. 기독교인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로 거듭난 바울은 기독교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를 마시고, 아담이 지은 ‘원죄’ 하나는 해결 받았다.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 받았다는 말은 이제 겨우 마귀 발 아래서 나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성령'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 보니, 기독교인들 마음속에서는 죄가 왕 노릇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죽은 영’이 기독교인들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독교인들은 굉장히 기분 나쁘겠지만, 기분 나쁘더라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기독교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도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으로 유대인들의 죄가 도말 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 역시 장차 오실 예수의 모형 아래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누구도 이것이 예수 모형으로 드리는 제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 역시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예수가 오셨을 때 믿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유대인들도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은, 하루 속히 예수를 자신들 앞에 빨리 보내 달라는 의미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래야 율법을 거역한 죄를 해결 받고 영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 앞에 제사를 왜 드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다 보니 엉뚱한 것을 붙잡고 구원이라고 주장하다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육체가 병든 자들이 도리어 예수를 믿고 천국에 먼저 들어가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려도 짐승의 피와 살이 유대인들의 죄를 없이 하지 못하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도 그것으로는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가 도말 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 이름 속에는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아담이 지은 ‘원죄’ 하나는 해결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해결해 주셔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인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믿는 자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죄를 짓게 하는 ‘죽은 영’을 쫓아내고 인간의 주인이 되어 주신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주인이 되어 주시면, 그때부터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게 되므로 그리스도가 이끄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가 이끄는 삶은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이기 때문에 절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일도 내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런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예배 드리는 자를 찾고 계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것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오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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