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주일 말씀
본문: 사도행전9:1-9
제목: 바울의 예표로 오신 그리스도!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사도행전9:3-6).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바리새파 출신이요 율법에 능통한 자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다 옥에 가두는 일을 밥 먹듯이 하였다. 그가 얼마나 율법으로 의로워져 있었으면,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를 가편 투표를 통해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겠는가? 이것만 보더라도 바울이 어떤 자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결국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내던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되면, 기독교인들 역시 당시 사울처럼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이단시 하며 나중에는 죽이려 들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들은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아 구원이라고 말하는데, 그리스도는 성령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죽이려 하는 것이다.
당시 사울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데, 예수는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이단시 하며 죽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들은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데, 그리스도는 성령으로는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려 하는 것이다.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중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는 음성을 듣고, 눈이 멀게 되어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게 된다. 바울에게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바울이 말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증거다. 죄인은 참 빛을 볼 수 없다. 보게 되면 바울처럼 눈이 멀게 된다.
그런데 이런 바울을 예수께서는 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을까? 예수에게는 이미 열두 제자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제자는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 그것도 예수 믿는 자들을 그토록 핍박하던 자를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비밀은 오직 하나님 품속에서 나오신 아들만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던 것은, 바울이 훌륭하거나 의로워서가 아니라, 장차 예수께서 바울 같은 자를 통해 이방인들 앞에 가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해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던 것이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처음 듣는 이런 말이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나중에 되어질 일을 미리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시거나 혹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후에 그 일을 이루어 가신다. 마찬가지로 예수 역시 장차 이방인들 앞에 가서 하게 될 일을 미리 바울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바울을 장차 되어질 일의 예표로 삼았던 말에 어리둥절 하겠지만, 이는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다. 다만, 기독교인들이 어둠 속에 살다 보니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공중 재림에 앞서서 바울 같은 자를 통해 이방인들 앞에 먼저 오시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방인들 앞에 먼저 오시는 이유는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성령의 뜻(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인들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듯이, 기독교인들은 또한 누구도 성령의 법을 지킬 수 없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법(성령의 법)을 어기고 죄 아래 갇혀 있게 되었다. 율법 아래 갇혀 있던 유대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육체를 입은 예수가 오셨듯이, 성령의 법 아래 갇혀 있는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인격적으로 다시 오신 것이다.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이 인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직접 들어가서 죄를 짓게 하던 ‘죽은 영’을 쫓아내고 인간의 주인이 되어 주신다. 그런 다음 세상 마지막 날 공중에 재림하여 땅에서 알곡(그리스도로 거듭난 자)으로 인(印)친 자들을 공중으로 불러 올라가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던 이유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이방인들 앞에 바울 같은 자를 통해 먼저 오셔서, 이런 일을 하겠다는 것을 바울을 통해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서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는 말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만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가 영으로 바울 마음속에 직접 들어가셨다는 말이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가 살아 계실 때 각자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은 자들이지만,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가 자기 마음속에 들어오신 후에야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열두 제자들은 마음속의 죄를 먼저 해결 받은 후, 마지막에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를 통해 성령을 받고 온전케 되었다면,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가 먼저 바울 마음속에 들어가신 후,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고 온전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열두 제자와 바울의 다른 점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았더라도, 이것 만으로는 아직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 이유는 아직도 해결 받아야 죄가 한 가지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조상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지은 ‘원죄’이다. 아담이 지은 ‘원죄’는 마귀를 멸하는 일이라서 예수를 믿은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반드시 예수께서 피 흘려 죽어야만 해결될 수 있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의 영(靈)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는 죄 없는 예수가 피 흘려 죽어야만 인간의 영(靈)을 놓아주게 된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죄를 짓게 하는 ‘죽은 영(귀신)’은 얼마든지 예수의 권세로 쫓아낼 수 있지만, 인간의 영을 지배던 마귀는 예수의 피 흘림이 없이는 절대 떠나지 않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주신 것은 오직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다. 세상 임금인 마귀는 인간의 영(靈)을 지배하나, 귀신은 인간의 혼(魂) 즉, 인간의 마음을 지배한다. 따라서 인간은 반드시 이 두 가지 죄를 해결 모두 받아야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바울 마음속에 들어가셨지만, 그것으로 바울이 온전케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바울에게 지시하여 다메섹으로 내려가서 아나니아 제자의 안수를 받도록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바울이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성령까지 받아야 비로소 바울의 영(靈)과 혼(魂)이 완전히 죄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인간이 지은 두 가지 죄악 중에서 단, 한 가지 죄라도 해결 받지 못하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바울은 기독교인들과 다르게 성령도 받고 마음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를 통해 아담이 지은 ‘원죄’하나만 해결되었을 뿐, 아직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다. 죄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말은, 죄가 주인(왕)노릇하고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이 바울처럼 인간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계시지 않으면 당연히 '죽은 영'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되어 있다. 죽은 영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겠는가? 이것만 보더라도 기독교인들은 아직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가 육체로 계실 때는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부활하신 뒤로는 예수도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원리에 따라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믿는 자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죄를 짓게 하는 ‘죽은 영(귀신)’을 쫓아내고 인간의 주인이 되어 주신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있는 자를 두고 알곡이라 부른다. 계시록에서는 이를 두고 인(印)맞은 자라고 한다.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은 반드시 자기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셔야 한다. 그래야 타락으로 가지 않는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아니하면 제 아무리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자라도,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끝에 가서는 모두 타락으로 가고 만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처음 성령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눈이라도 빼줄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마는 이유는, 자기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두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냐?'며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에게 주신 영적인 율법과 영적인 복음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 영적인 율법이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주신 율법으로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성령의 뜻(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성령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 그것이 모두 하나님 앞에 죄가 되고 만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이 모두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과 같다.
성령의 뜻대로 사는 것이란?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가령, 예수께서 미워하지 말라고 했으면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이미 미움이라는 죄악이 자리 잡고 있다 보니 남을 미워하지 않고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라고 하신 말씀도 기독교인들로서는 누구도 지킬 수 없다. 이런 죄악(미움, 시기, 질투, 음란, 거짓, 분노, 탐욕)이 기독교인들이 마음속에는 가득하다. 그러니 누가 성령의 뜻(말씀)대로 살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지은 죄(자범죄)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말씀)대로 살지 못한 이방인들을 모두 ‘영적인 율법’ 아래 가두어 두기 위해서 성령을 주신 것이다. 그래야 기독교 2천 년 역사 마지막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서, 성령의 법(영적인 율법)아래 갇혀 있는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대인들을 율법 아래 가두어 놓은 다음, 유대교 2천 년 역사 마지막에 예수를 보내서 유대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기독교인 누구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성령만 받으면 무조건 구원이라며 안하무인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안하무인으로 신앙생활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성경은 분명히 첫 것은 모형으로 주신 것이요 두 번째 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어둠 속에 사는 하나님 백성들로서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모형으로 주신 것을 붙잡고 있다가 멸망으로 가고 만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바울을 통해 장차 이방인들 앞에 가서 하실 일에 대하여 충분히 보여주셨다. 이제 이방인들은 자신이 성령의 뜻(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인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은 끝까지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인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지 못하여 끝내는 멸망으로 가고 만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여 멸망으로 갔던 것이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고 있다.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때가 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 같은 자를 통해 도적같이 우리 앞에 오셨다. 자신이 성령의 뜻대로 살지 못하여 죄인으로 여기고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겠지만, 이와는 반대로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가 공중에 재림할 예수만 기다리고 있을 뿐, 인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인들 역시 바리새인들처럼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여 멸망으로 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서 2천 년 동안 죽도록 신앙생활 하였지만,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예수를 믿지 못하는 바람에 모두가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의 법’ 아래서 2천 년 동안 죽도록 신앙생활 하였지만,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게 되면,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지 못하여 마지막에는 불사름 속에 던져지고 말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하여 그렇게 되었다 쳐도, 적어도 기독교인들은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하다가 멸망으로 갔던 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가던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길을 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그리 두 백성이 꼭 닮았는지 모르겠다.
이제라도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성령의 뜻(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인임을 깨닫고, 인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마굿간에 오셨듯이, 이방인들 앞에 오신 그리스도 역시 가장 천하고 낮은 자를 통해서 오셨다. 바울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후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는 자신을 가장 천하고 낮은 자(죄인)로 여기고 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자를 통해서 오신 것이다. 이를 두고 도적같이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가장 낮은 자(작은 소자)를 통해 오신 이유는 마음이 높아진 자들과 교만한 자들은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도적같이 오신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사 그리스도가 자기 옆에 계셔도 눈이 가리워져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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