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주일 말씀
본문: 로마서7:1-25
제목: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21-24).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바리새파 출신이다. 그리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여길 만큼 자신을 의롭게 여기던 자이다. 그가 얼마나 율법에 열심을 내던 자였으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다 옥에 가두는 일을 하고 다녔겠는가? 심지어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를 가편 투표를 통해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다.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자가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면 낼 수록 도리어 자기 의(義)만 쌓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아직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면 낼 수록 도리어 자기 의(義)만 쌓게 된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영)으로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다. “사울이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3-5). 그 후 바울은 예수의 강렬한 빛에 의해 눈이 멀게 된다. 그러자 예수께서 다메섹에 있는 아니니아를 찾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다메섹으로 내려가 아나니아를 찾아가 안수를 받자, 바울에게도 성령이 임하게 되었다. 그러자 바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성령을 받는 과정은 똑같다. 성령은 하나님 영으로서 인간의 육체를 입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속에 오시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은 인간의 머리 위에 임하여 인간의 영(靈)만 지배하신다. 성령을 받는 과정은, 성령을 먼저 받은 자의 안수를 받거나 말씀을 통해서 받게 된다. 어떤 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성령을 받는 자도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마귀를 멸하고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백성도 아닌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마귀 발 아래서 나와 하나님의 영적인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영적인 백성이 된 이방인들은 반드시 성령의 뜻(예수께서 말씀 하신)대로 살아야 한다. 만약 성령의 뜻(말씀)대로 살지 못할 경우,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성령의 법'아래 갇히고 말게 된다. 그러나 마음속에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이방인들로서는 누구도 성령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모두가 '성령의 법'아래 갇히고 말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이 바로 이방인들의 '성령의 법'아래 가두어 두기 위해서다. 그래야 기독교 2천 년 역사 마지막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서 '성령의 법'아래 갇혀 있는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속에 오시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자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오시게 된다. 곧 말씀이 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믿는 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영으로 들어가 좌정하시게 된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가 좌정하게 되면, 그동안 인간의 마음속에서 주인 노릇을 하던 ‘죽은 영’이 쫓겨나고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주신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주인이 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나를 이끌어 가게 되므로 다시는 죄에 거하지 않게 된다. 이런 자가 바로 바울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중에는 아직 바울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가 한 명도 없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 앞에는 이제야 그리스도가 오시기 때문이다.
당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는 말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가 바울 마음속에 직접 영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오늘날 꿈이나 환상을 통해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것은 천사의 현현을 통해 만난 것이라서,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는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권세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처럼 부활하신 예수가 직접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가게 되면, 먼저는 본인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에게도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권세가 따르게 된다. 당시 바울이 자신을 믿는 자들의 죄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하신 예수가 바울 마음속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미 열두 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울 마음속에 들어가서 이방인들 앞에 나타났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이름을 전해줘서 성령을 받게 한 다음, 이방인들을 하나님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 백성으로서 신앙 생활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공중 재림에 앞서서 부활하신 예수가 이방인들 앞에 도적같이 다시 오시는데, 그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울처럼 사람의 육체를 입고 다시 오시겠다는 것을 미리 바울을 통해 예표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이단 취급하지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처음 듣는 이런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장차 되어 질 일들을 미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거나 또는 예표로 미리 보여주신 후 그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좋은 예로 이삭의 예표로 유대인들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리고 이방인들 앞에는 야곱의 예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오시게 된다. 이에 따라 예수 또한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때,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시겠다는 것을 바울을 통해 미리 예표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이런 예표를 미리 보여주지 않고 오시게 되면, 기독교인들이 부활하신 예수가 사람의 육체를 입고 다시 오신다는 말이 어디 있느냐며, 그리스도를 이단 취급하며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인 누구도 그리스도가 사람의 육체를 입고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핑계치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직접 바울의 육체를 입고 이방인들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오늘날 자칭 재림 예수라고 하는 자들이 도처에 나타나 자신도 예수가 보내서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성경 어느 말씀에 근거해서 왔는지 정확한 출처를 대야 한다. 만약 성경에서 정확한 근거를 대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가 인간의 영혼을 사냥하러 온 거짓 목사요 이단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겉만 양의 탈을 썼을 뿐,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 떼가 가득한 자들이다. 그리스도가 오시기도 전에 이런 자들이 먼저 일어나서 설치는 것은 진짜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리스도를 이단 취급하여 믿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 거짓 그리스도가 먼저 나타나 설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아직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라서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 목사들은 아직도 죄에게 종 노릇 하고 있는 자들이다. 종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마음을 다해서 자신에게 맡겨준 양떼들을 잘 돌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양들이 받친 헌금을 가지고 호텔에서 비싼 음식이나 사 먹고, 선교 명목으로 관광이나 다니며 쾌락을 즐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종들은 열 번 잘 하다가 한번만 잘못해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기독교 목사들은 이 말을 가슴에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겉으로 보면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바울 마음속에는 부활하신 예수가 계셔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바울이 하는 말에는 인간의 죄를 해결 할 수 있는 권세가 따른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아들(예수)에게만 인간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따라서 바울 또한 자기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이방인이라도 당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믿었던 자들은 모두가 영생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예수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은 다음, 자신도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바울을 마음으로 믿지 않고 바울 곁을 떠나게 되면, 그런 자는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영적인 백성은 되었지만,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반쪽짜리 구원에 머물고 말게 된다. 당시 바울이 전하는 예수 이름을 믿고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이라도, 바울을 마음으로 믿지 아니하고 떠나게 되면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갈라디아 3장을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심하게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는 그들이 바울이 전해준 예수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은 자들이지만, 바울을 마음으로 믿지 아니하고 성령 받은 것을 앞세워 자신들도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바울 곁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신앙 생활 했던 것이다. 바울을 끝까지 마음으로 믿어야 바울 마음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게 되는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바울 곁을 떠나서 마음대로 살게 되자, 바울이 화가 나서 그들을 심하게 책망했던 것이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AD65년 경에 목 베임을 당하여 죽게 된다. 그러자 그리스도 사역 또한 바울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없이 예수 이름만 전해지게 되었다.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만 불러도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세상 임금인 마귀를 멸하고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 받았다는 증거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오실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을 기독교인이라 부르는데, 이는 하나님 법(성령의 법)아래서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모형 아래서 신앙 생활하는 자들을 기독교인이라 부른다.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아담이 지은 ‘원죄’ 하나를 해결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원죄’ 하나를 해결 받은 것으로는 이방인들은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 이유는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죄악(미움, 시기, 질투, 분노, 거짓, 도적, 음란, 탐욕)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고도 성령의 뜻(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이 방해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자범죄’는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리고, 자기 몸을 불살라 구제하는 일을 했더라도 해결되지 않는다. 또한 아무리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자라도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령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깨닫게 할 뿐,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어떤 노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만 보더라도 기독교인들은 아직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누구를 통해서 해결 받아야 되는가? 이는 기독교 2천 년 역사 마지막에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해결 받을 수 있다. 2천 년 전 사도 바울 마음속에 계시던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시는데, 그때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인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서두에 바울은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말했던 것이다.
바울이 기록한 모든 성경은, 바울이 율법 아래 살던 때의 모습과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거듭난 후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21-24).
바울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았다면, 바울 또한 위와 같은 고백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이 위와 같이 고백을 한 후 로마서 8장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말하고 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던 바울 마음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들어오고 보니 비로소 자신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생긴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위와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의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철석 같이 믿고 있지만, 바울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오시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자신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생긴 모습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인들 또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탄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를 모르고 자신도 마치, 바울처럼 죄인이 된 줄 알고 로마서 8장을 인용하여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처럼 죄인이 되어 본 적이 없는 기독교인들이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면 어찌 되겠는가? 기독교인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는 것으로 잠시 남을 속일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귀신(죽은 영)은 속일 수 없다. 귀신은 영적인 존재라 인간의 마음속에 누가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금방 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인간은 속여도 귀신은 속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예로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행19:14-16).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면 낼수록 귀신들은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꼼짝달싹 못 하게 할 것이다. 지금도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가 예수로 둔갑한 귀신에게 속아서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정작 자기 마음속에 누가 주인인지 모르는 자들을 두고 영적인 소경이라 부른다.
기독교인들은 이제라도 자신이 성령의 뜻(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인임을 깨닫고, 바울의 예표로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자범죄)를 해결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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