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성령의 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자가 없다.

거친반석 2014. 1. 5. 14:40

본문: 갈라디아서3:1-14

제목: 성령의 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자가 없다.

 

율법아래 살다가 예수를 만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육체에 주신 율법은 유대인들의 죄를 깨닫게 할뿐,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방인들 앞에 바울처럼 사람을 통해서 영적으로 오신 주님께서,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이방인들에게 주신 성령의 법은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숨은 죄악을 깨닫게 할뿐,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성령의 법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기독교인들 역시 그를 이단이라며 상종도 하지 않으려 한다.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이 아니고,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의 구원과 율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의 구원과정이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구원이라고 하니까 이방인들도 덩달아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으니까 구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하나님 백성이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법아래서 약2천년 동안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법은 누구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두가 죄인이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믿는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는 방법이다. 죄인이 된 그들을 아들을 보내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탄생한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무조건 예수 이름만 부르면 모두가 구원이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 백성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그들에게는 절대 구원이 없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도 없이 개, 돼지 같이 살던 사람들이다. 이방인들을 개, 돼지로 비유하는 것은, 개가 토한 것을 도로 주워 먹듯이, 이방인들은 똑같은 죄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돼지가 똥 위에서 먹고 자듯이, 이방인들 또한 날마다 죄악을 먹고 마시며 죄악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방인들이 날마다 이런 죄를 먹고 마시며 살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 없다보니 이방인들이 전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실 목적으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법을 주셨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주신 성령의 법이다. 그때부터 이방인들도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부패한 이방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한다. 만약 이방인들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게 되면 마지막에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는 것은,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의 효력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 영으로서 구약 때도 계셨다. 그러나 그때는 예수가 오셔서 피흘려주시기 전이라 인간들 속에 내주하지 못하시고, 인간의 몸 밖에서 선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일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피는 세상 임금인 마귀를 심판하고,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다. 아담의 범죄로 그동안 마귀 발아래서 신음하던 인간의 영을 예수 피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원죄는 단회적 사건이므로 한번만 해결 받으면 된다. 다시 말해서 두번 세번 예수 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간을 지배하고 있던 마귀가 예수 피로 말미암아 쫓겨나게 되자, 비로소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마귀가 지배하던 인간의 영을 다시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런 원리로 오늘날 예수 이름으로 부르는 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성령이 오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처음 성령을 받게 되면, 누구나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성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주시는 것으로 알았는데, 자신들도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게 되자 모두들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하여 감격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주신 성령은 구원의 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마음속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다.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게 되자 유대인들이 깜짝 놀라게 된다. 유대인들이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왜 하나님 법도 없이 개, 돼지처럼 살던 자들에게까지 성령을 부어주시냐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이 성령 받은 이방인들을 질투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번씩 강조해서 말하지만, 유대인들이 받은 성령은 구원으로 가기 위한 지름길이요 이방인들이 받은 성령은 이제 막 하나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출발점으로 주신 것이다.

 

율법 아래서 약2천년 동안 살다가 예수 이름을 부르고 유대인들이 받은 성령과 하나님 법도 없이 개, 돼지처럼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 이름을 부르고 이방인들이 받은 성령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게 되면 율법의 종지부를 찍고 곧바로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 백성으로서 율법을 받아 첫 삶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이를 착각하여 자신들도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으니까 성령을 받은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구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기독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은 마치,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 율법아래서 성경을 해석하고 유대인들을 가르치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자신을 바울과 같은 위치에 갖다놓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자기가 쳐놓은 올무에 걸려들고 말게 된다.

 

갈라디아 3장에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한 갈라디아 인들을 심하게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러나 갈라디아 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성령을 따라 살 수 없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 인들은 이방인들로서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이라 어느 누구도 성령을 따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갈라디아 인들을 책망하는 이유는, 바울은 갈라디아 인들을 자신의 틀에 맞혀놓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임한 성령을 오해하듯이, 바울역시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면,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율법 아래서 살던 사람들이다. 바울 역시 율법 아래 살던 사람이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육체로 오신 예수를 믿게 되면, 율법의 저주로 병들었던 몸이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자범죄를 사함 받는 순간이다. 예수를 믿고 자범죄를 사함 받은 자들이 끝까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되면, 예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게 되면 그들은 완벽한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게 되면, 유대인들처럼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이방인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율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율법은 육체가 아닌 이방인들 마음속에 주셨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 마음이 모두 부패하여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도 자신들의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이방인들이 자신의 죄를 들고,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하나님 아들 앞으로 나가서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갈라디아 인들도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당시 갈라디아인들 역시 마음이 부패하여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고 자꾸만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바울이 그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성령을 받았던 갈라디아 인들이나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나 모두 똑같은 이방인들이다. 따라서 성령의 법으로는 이방인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인과 달리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으로서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를 만난 후 눈이 멀었으나,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을 받고 눈을 뜨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게 되면 누구나 마음속의 죄를 먼저 사함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성령을 받으면 그들은 그것으로 온전한 구원에 들어간다.

 

열두제자들 역시 예수로부터 마음속의 죄를 먼저 사함 받았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마지막에 성령을 받았다. 성령이 오셔서 죄가 없는 그들의 마음을 붙잡고 일하셨던 것이다. 예수 역시 성령께서 오셔서 죄 없는 예수 마음을 붙잡고 일하신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 하셨던 것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름실과로 부른다. 그 이유는, 여름실과는 저장이 되지 않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는 곧바로 하나님 창고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 영을 마음속에 모신 사람이다. 왜 바울에게만 이런 특혜가 주어졌는가? 그것은 바울이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로 하여금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 영을 받게 했던 것은,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 역시 바울과 같이,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 영을 받은 자가 영적인 하나님 아들로 오시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갈라디아 인들이 도저히 성령을 따라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갈라디아 인들이 책망했던 이유는, 바울이 갈라디아 인들을 유대인들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울의 가르침은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바울은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입장에서는 당연히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한 이방인(갈라디아, 고린도, 에베소)들을 책망할 수밖에 없다. 바울이 이렇게 책망한 내용을 성경에 기록해놓아야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그리스도께서 그 말씀들을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만 완수할 뿐, 그 다음 세대에 일어날 일들까지 바울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좋은 예로 이사야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한다. 하지만, 이사야 역시 메시아가 오셔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예언은 예수께서 이루어 주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완성시켜 주실 분이 곧 이방인들 앞에도 오실 것이다. 이방인들은 그렇게 오시는 분을 하나님 아들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스라엘 땅에 율법학자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구약에 기록된 성경말씀을 율법학자 어느 누구도 바르게 해석한 사람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구약 성경을 만분의 일이라도 제대로 해석했더라면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그들이 그토록 무참히 짓밟지는 안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아래 사는 백성들의 한계다. 그러나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주셨던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바르게 풀어주시고, 그 말씀을 이루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아들 한분뿐이시다. 만약 하나님 아들이 오셔서 신약 성경을 바르게 풀어주지 않는다면, 기독교인들로서는 절대로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 없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만분의 일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기독교인들 역시 영적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서 홀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죄 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로서는 도적 같이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이단이라 하여 배척하게 될 것이다.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이 성령의 법을 거역한 죄인이라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도적같이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기독교인들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