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13:22-30
제목: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신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죽도록 제사를 드린 사람들이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열심히 예배를 드린 사람들이니까 죽으면 모두가 천국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 아래서 약2천년 동안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생활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다. 그들은 성전에 나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모두가 거룩하게 되어 자동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줄 믿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마다 그들은 점점 더 거룩한 백성이 되어 갔다.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낼수록 점점 더 자신의 의(義)만 쌓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율법 아래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도 나름대로 힘든 점은 있었다. 이방인들처럼 마음대로 행동하며 살 수가 없었고, 율법의 제약 때문에 아무거나 먹을 수도 없었다. 더 나아가 안식일을 지키는 일과 또한 여러 가지 율법이 금하고 있는 것들이 많아서, 이방인들에 비해서 훨씬 더 힘든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 고통을 감수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런 고통쯤은 백번 천 번 겪고서라도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일까?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으로 인한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아온 백성들인데 굳이 예수께서는 왜 또 다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서 살아온 삶은 결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을 믿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자신들은 지금까지 성전에 나가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그로 인해서 자신들의 죄가 도말되어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는데, 누구를 또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백성들 생각이고,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믿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범죄를 사함 받고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들은 율법에 따라 열심히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왔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죄가 도말되어 모두가 천국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또 다시 예수를 믿으라니 그것도 전혀 볼품없게 생긴 목수의 아들을 하나님 아들로 믿으라니, 어느 누가 그런 사실을 믿으려 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 하시는 좁은 문의 의미이다.
율법 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의 규례에 따라 성전에 나가서 소와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 드렸던 것은, 하나님 백성이 법에 따라 하나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싫던 좋던 간에 누구든지 해야 한다. 하나님 백성이 법이 지키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 몸에 병이 들게 되어있다. 이스라엘 땅에 유독 병든 자가 많았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범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이를 수 없으므로, 율법 아래 살던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어야 하는데, 아들을 믿는 일은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믿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는 일은 본인이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를 두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배당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모든 죄가 도말되어 천국에 이를 것으로 믿고 있다. 유대인들이 걸어갔던 길을 기독교인들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데서 오는 무식의 소치이다.
자신들을 그토록 거룩하다고 여긴 이스라엘 백성들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율법에서 모두 넘어졌다. 그렇다면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날마다 마음속에 올라오는 온갖 더러운 죄악들을 물리치고 성령의 법을 온전히 따라 살 수 있겠는가? 기독교인 중에서 어느 누구도 성령의 법을 따라 살자는 없다. 하나님께서 두 백성들에게 각각 율법과 성령의 법을 주신 이유는, 각각 자신들의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법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어야 가능하다.
기독교인들 역시 현재는 모두가 성령의 법에 따라 하나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지,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법을 지켜서 천국에 이를 자는 단 한명도 없다. 왜냐하면 법은 누구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법을 지켜서 천국에 이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른 받은 자들은 싫던 좋던 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만약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법을 어겼을 경우,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속에 병이 들게 되고, 마음속이 병들게 되면 그때부터 죄가 깨달아지지 않는 것이다. 죄가 깨달아지지 않게 되면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되고,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되면 그는 죄를 깨닫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 또한 믿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영적인 문둥병에 걸린 자이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령을 거역하여 영적인 소경, 영적인 절름발이, 영적인 귀머거리, 영적인 혈루증을 앓고 있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많이 있다. 이들은 모두 영적인 아들이 오셔서 해결해 주셔야 한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원죄를 사함 받았다는 증거로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성령은 아버지의 영으로써(참조마10:20) 하나님의 법도 없이 살던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율법 역할을 하신다. 영적인 율법이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주신 법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성령의 법이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그나마 기독교인들이 오늘날까지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처럼 성령의 법에 따라서 예배당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린 것을 가지고 자꾸만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은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자꾸만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으로 부른 받은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의 법을 따라 살자니 온갖 고통이 따른다. 불신자들은 마음 놓고 놀러 다니며 먹고 마시는데 비해서, 기독교인들은 주일날 하루 종일 교회에서 지내야 하고, 또한 함부로 놀러 다닐 수도 없고 또한 아무거나 마음 놓고 먹고 마실 수도 없다. 거기가 날마다 새벽예배에 나가야하고, 수요예배와 금요철야 또한 기독교인들의 발목을 잡는다. 아무튼 불신자들의 자유로운 생활에 비하면 나름대로 크나큰 고통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정도 불편과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하고서라도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일까?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법아래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으면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또다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의 법아래서 살아온 삶으로는, 결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인가? 그것은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믿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자신들은 지금까지 예배당에 나가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죄가 도말되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누구를 또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단 말인가? 하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인들 생각이고,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믿어야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사함 받고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말에 모두들 시큰둥하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들은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아 성령의 법에 따라 열심히 하나님 앞에 예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고, 그것으로 모두가 천국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또 다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으라니, 그것도 전혀 볼품없게 생긴 자를 하나님 아들로 믿으라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말씀 하시는 “좁은 문”이라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은 알아야 한다.
성령의 법아래 살던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 나가서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법에 따라 하나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서 싫던 좋던 간에 누구든지 그 의무를 다 해야 한다. 만약 그 의무를 다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되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되어 기독교인들은 마음속이 병들게 된다. 마음속이 병든 자들은 악한 영에게 쓰임받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의 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이를 수 없다. 따라서 성령의 법아래 살던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어야 하는데, 아들을 믿는 일은 강요가 아니고 의무도 아니기 때문에 본인이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이 져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법은 기독교인 모두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서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법을 어기면 하나님의 저주로 마음속에 병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을 잘 지켰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 법은 오로지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할뿐이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말씀하신다. 이를 직역하면,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그것으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나를 믿고 천국에 들어가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기 싫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지 않아도 된다. 아들을 믿는 일은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또한 아들을 의무적으로 믿어야 되는 일도 아니다. 따라서 본인이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예수께서도 이를 두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천국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자신을 버리고 아들을 믿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법을 지켜서 천국에 들어갈 것 같았으면, 예수께서 굳이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버려야 하고, 그리고 세상에서 배운 학문과 지식도 다 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 아들을 믿게 되면 그것이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존심도 버려야 하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포기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버리지 못하면 결국 육신의 생각이 올라와서 아들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자식도 버리고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법 아래서는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예배당 가서 예배드리는 일이야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던가?
그러나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천국 가는 길이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좁은 문의 의미를 바로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린 것으로 천국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좁은 문이 왜 필요하겠으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일로 천국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왜 좁은 문이 필요하겠는가?
예수께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는 말씀은, 성령의 법에 따라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시는 말씀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는 자들이 너무도 적기 때문에 안타까워서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 백성이 성령의 법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의무이다. 그런 연고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주일날만 되면 모두 예배당으로 향한다. 그러나 법을 지켜서 인간이 천국에 이를 수는 없다. 법은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할뿐, 인간의 어느 것도 온전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아들을 믿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육체를 입고 오신 아들을 믿어야 하고, 기독교인들은 영적으로 오시는 아들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아들을 믿는 것은 법처럼 강요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의 의지로 믿어야 한다. 문둥병자가 자신의 문제를 들고 예수를 찾아갔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영적인 문제를 들고 영적으로 오신 하나님 아들 앞으로 달려 나아가야 한다.
세리와 창기들이 자신의 죄를 들고 예수 앞에 나아갔듯이, 오늘날 자신이 성령의 법을 거역한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는 자들은 아들 앞으로 달려 나갈 것이고,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를 배척하듯이, 오늘날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자들 또한 아들을 배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귀 있는 자들은 듣고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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