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

알곡과 가라지

거친반석 2015. 10. 4. 12:46

주일 낮 말씀

본문: 마태복음13:24-30

제목: 알곡과 가라지

 

요즘 가을들녘을 보면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 내내 땀 흘려 가꾼 보람이 이제야 결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누렇게 익은 벼들 사이로 낮선 얼굴이 보인다. 벼보다 키도 훨씬 크고 열매도 벼와는 다르게 거무티티하다. 우리 인간들에게 백해무익한 피다. 그가 벼와 함께 자랄 때는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고개를 내밀게 되자, 그도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그런데 피는 누가 일부러 심지도 않았는데 그 이듬해에 보면 어김없이 벼와 함께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이 가라지는 그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 것일까? 볍씨도 논바닥에 떨어지지만 벼가 그 이듬해에 다시 자라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벼도 피처럼 그 이듬해 다시 자라게 된다면 힘들게 농사지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곡식만큼은 반드시 땀 흘려야만 먹을 수 있도록 한 반면, 인간이 먹지 못하는 가라지들은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물들을 통해서도 우리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시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디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아니고 양을 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곡식의 비유를 들어 천국을 설명해주시고 있다.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바라고 땅에 씨앗을 뿌려보지만 그 씨가 모두 온전히 자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씨앗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새가 와서 주어먹기도 하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타죽기도 하고, 어떤 씨앗은 싹을 틔우고 나왔지만 가시덤불 때문에 자라지 못하고 중간에 말라죽기도 한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온전한 열매를 맺기까지는 많은 우역곡절을 겪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비유를 들어 천국을 설명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죄악 속에서 태어난다. 인간은 본래 선하게 지음 받았으나 아담이 뱀에 꾐에 넘어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사단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사단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마음속에서 죽은 영을 제거하기 전에는 어떤 인간도 선할 수가 없다. 바울은 이를 두고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불신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날 신앙생활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기만 하면 모두가 믿음 좋은 사람으로 여긴다. 거기다 교회에서 감투까지 쓰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믿음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많이 한 것을 두고도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충성봉사를 하게 되면 그런 자는 하늘에서 상급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다. 기독교인들은 현재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다면 모두가 까무러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모르다보니 모두가 사단의 지배를 받는 거짓목사들에게 속아서 구원 받았다는 말을 철석 같이 믿고 있는 이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죄를 짓게 하는 죽은 영을 몰아내지 않으면 인간은 어느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다. 도리어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죽은 영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속이고 기독교인들을 배나 지옥 자식 만들어가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신앙생활에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지만, 예수를 믿지 않아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백성들까지도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들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서도 이런 현상은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품성이 그리스도로 바뀌지 않는 한, 인간은 모두가 죄악의 본질이 자라나서 결국은 가라지가 되고 만다.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고 자신을 쫓으라고 했던 것은, 인간의 본질이 악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예수를 쫓으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서 어느 누가 자신을 목숨을 버리고 예수를 쫓아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결코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없다. 자기 목숨을 버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믿을 수 있겠는가? 모두가 허울 좋은 말뿐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쫓아 살고 있다면, 적어도 오늘날 기독교가 불신자들에게 개독교 소리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만 부를 뿐 예수의 삶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로 비아냥거리고 있다.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개에 비유한 것은, 그들이 알고 그런 표현을 했던 모르고 했던 간에 개가 토한 것을 도로 주어먹듯이, 기독교인들 역시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있기 때문에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아직은 이방인들의 때가 되지 않아서 이방인들 앞에는 그리스도께서 인격적으로 오신 적이 없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결코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없다. 예수가 눈앞에 있어도 자신의 목숨을 버릴까 말까 한데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겠는가? 혹시 기독교인들 중에 자신은 목숨을 버리고 예수를 쫓아 살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자는 신념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인들이 테러를 일삼다가 죽으면 알라가 데려간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신념이 믿음으로 둔갑하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자기 신념을 믿은 것이기 때문에 구원하고 거리가 멀다.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아들을 인간들 앞에 인격적으로 보내주시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육신을 입은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란 절대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눈으로 보면서 믿도록 하기 위하여 육신으로 모양으로 인간들 앞에 보내주신 것이다. 결국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쉽게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사람의 모양으로 인간들 앞에 보내주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이는 아들을 믿게 되면 얼마든지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아직까지 예수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보고 예수를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내용만 보고 자기 목숨을 포기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예수가 눈앞에 계시다면 자기 목숨을 포기할 때 예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고 말씀이라도 할 텐데,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신념으로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념에 의한 믿음이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인들 앞에도 하늘에 오르셨던 예수께서 사람을 통해 인격적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다.

 

사람을 통해 영으로 오신 예수께서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자신의 생각대로 살지 말고 예수의 뜻을 좇아 살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생각대로 살면 사망이요 예수의 생각대로 살게 되면 곧 생명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살게 되면 죽은 영의 지시를 받으며 살기 때문에 가라지로 자라게 되어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사람을 통해 인격적으로 오신 예수께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뜻을 쫓아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