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말씀
본문: 누가복음7:36-50
제목: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함께 음식 잡수시기를 권하자, 예수께서 그 집에 들어가 앉으니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말에 입 맞추며 향유를 머리에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죄인인가를 알았으리라! 예수께서 즉시 바리새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빚진 두 사람의 비유를 들어,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고,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는데 주인이 둘 다 빚을 탕감해주었을 때 누가 더 저를 사랑하겠느냐는 질문으로 바리새인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잘 믿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는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독수리가 그려진 로마황제의 깃발을 꽂으려 하자, 당시 제사장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우상숭배이므로 절 때 그것을 허용할 수 없다며 성전으로 향하는 길목 양쪽에 엎드려 목을 내밀고는 차라리 우리 목을 베고 지나가라고 말하자, 유대인에게서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로마 군인들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이런 열심을 갖고 있었기에 바리새파 출신들이 모든 요직을 두루 장악하고 있었다. 스데반 집사를 가편 투표로 죽이고 말았던 사도 바울도 사실은 바리새파 출신이다. 이렇게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던 사람들이었기에 자신들과 조금만 마음이 맞지 않으면, 그들은 단번에 이단으로 정죄하거나 미친놈 취급을 하였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서 예수를 자기 집에 초정해놓고도 예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그가 얼마나 예수를 무시하고 있었던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죄인이라고 나오는 그 여자는 예수가 바리새인 집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달려가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어주었으며 그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던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어드렸던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눈물로 발을 적시고 예수의 머리에 향유 좀 부어드렸다 하여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시는가? 이는 그녀가 적어도 예수가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고 있는 만큼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아니! 그녀가 어떻게 예수를 처음 보는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날 이런 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가 예수를 사랑한다고 했던 말은, 우리가 흔히 육신적인 생각에서 “주님을 사랑 한다”가 아니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내가 죄로 인해 죽게 생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조건으로 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께서 바리새인 집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서 눈물로 예수 발을 씻겨주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자의 그런 행동을 보고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 하시며,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결국 죄가 많은 자만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믿도 끝도 없이 무조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 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육신적인 생각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모독하는 말이요 더 나아가 예수를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비하시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욕보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매년 부활절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벌써 몇 주 전부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며 금식을 하고 절재 된 행동들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부활절 1주일 전은 고난주간이라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핼쑥해진 얼굴에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며 말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일까? 성경에 보면 예수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많은 여자들이 예수께서 곧 처형당할 것을 알고 눈물로 예수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은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울어야 하는데, 도리어 주님을 위해서 운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자신의 죄 때문에 울어야 하는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며 금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주님을 위해서 울어야 한다면,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죄 없는 예수께서 십자가게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하는 비통함 때문에 울어야 한다. 결국 내가 지은 때문에 예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런 자는 평생 주님을 죽도록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중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우는 자가 없다. 그것은 자신의 죄악을 깊이 깨닫는 자가 없다는 증거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육체에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 영적인 백성이 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도 “영적인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체에 주신 율법을 온전히 따라 살 수 없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모두가 마음이 부패하여 어느 누구도 성령(영적인 율법)을 온전히 따라 사는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지금은 기독교인들 모두가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 되어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인 모두가 “영적인 율법”아래 갇혀 있는 것이다. “영적인 율법”아래 갇혀 있는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이제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부득불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실 때는 육체를 입은 인간을 통해서 다시 오셔야 한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빛(영)으로 사도 바울 마음속에 들어가셨던 사건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영으로 사도 바울 마음속에 들어가서 일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이방인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다시 오시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현재 모두가 성령을 거역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사람을 통해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성령을 거역한 죄를 해결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중에도 바리새인 같은 자들이 수두룩하다. 기독교인들 중에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 바리새인 같은 자들이다. 하나님께 유대인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육체에 율법을 주었듯이,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율법”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무조건 예수 믿고 성령만 받으면 구원 받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들 모두가 크나큰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리새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던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믿는 자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처럼,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초청해 놓고도 발 씻을 물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면전에 두고 개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는 자신이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처럼 주님께서 보낸 자를 주님께 하듯이 깎듯이 대우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죄악의 깊이를 아는 자는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주님을 죽도록 사랑하게 될 것이나,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홀히 여기게 될 것이다. 이로서 기독교인들 중에도 부활하신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자는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지겠으나, 그렇지 못한 자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이로서 기독교인들도 마지막에는 알곡과 쭉정이로 극명하게 갈리게 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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